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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부채 땜질처방 이제 그만] 中. 허점투성 투·융자 사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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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젖소 50마리를 키우는 목장에 정책자금을 받아 1억2천만원짜리 네덜란드식 자동 착유처리시설을 들여 놨습니다.뼈빠지게 일해도 이자 갚기가 버겁습디다.”

경북 군위군에서 5천평 규모의 목장을 하는 柳기현(40)씨는 농어촌구조 개선사업이 한창이던 1995년 시설농으로 선정되려면 첨단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군청측의 권고에 따라 무리한 투자를 해 놓고는 요즘 뒷감당에 짓눌려 있다.그는 “이제 와서 생각하니 헛꿈을 꾸어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92년부터 막대한 세금을 투입해 농업생산시설의 규모화·현대화·자동화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농어촌 투·융자 사업은 시작부터 부실이 예고됐었다.

정부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농산물 수요를 전제해 놓고는 IMF 등 경제상황 악화,과잉생산 ·시장개방 등 전반적인 여건 변화에 대처하지 않은채 생산기반 투자에만 급급했다.그 결과 정책자금의 나눠먹기식 집행이 횡횡했고,농민들은 앞뒤 안가리고 “쓰고 보자”고 달려들었다.당국의 사후관리도 부실했다.

◇주먹구구식 집행=농민들에게 지원되는 자금은 크게 ▶정책자금(연리 6.5%) ▶보조금(무상) ▶농협 상호금융 자금(연리 10∼12%)등 세가지다.

이중 정책자금은 농어촌구조개선사업이 진행된 92∼98년에 17조원,농업·농촌 투융자 사업이 시작된 지난해 1조6천여억원 등 모두 20조원이 풀렸다.시설농가 ·도로 확포장 등 농업기반기설 확충에 26조원의 보조금이 지원됐다.

문제는 정책자금과 보조금 집행 과정이 너무 부실하다는데 있다. 농림부는 매년 정책자금 예산을 짜 각 시 ·도에 배정하고 각 지자체와 농협은 이를 받아 집행한다.분야별 유사사업이 올해는 74개로 통 ·폐합되기는 했지만 97년에만도 1백34개나 돼 전문성이 떨어지는 지자체들은 원예 ·화훼 ·축산 ·양계 등 각 분야의 사업 계획서를 대충대충 심사할 수 밖에 없었다.

농협도 배정된 자금을 상환능력이나 수익성 등을 면밀히 따지지 않아 군 농업발전심의회에서 사업계획만 통과되면 이중 삼중으로 정책자금(보조 5:융자 3:자부담 2 비율)이 나오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정수령 사례도 적지 않았다.

전북 김제시 농협 조합장 柳모(51)씨의 경우 지난해 12월 부인 등 가족 명의로 특별영농자금 1억2천여만원(연리 6.5%)을 대출 받았다.가족명의로 대출을 받은 뒤 유씨는 이 돈으로 3개월전에 빌린 일반 대출금(이자율 12%)을 갚았다.

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 오이 시설재배를 하는 吉모(50)씨는 “하우스 땅을 담보로 싯가의 세배가 넘는 정책자금을 지원받아 지금은 경매에 들어가도 아까울 것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농식품신유통연구회 최양부 회장은 “시·군의 농민 사업계획서 심의가 대충대충 이루어져 농민들이 눈 먼 돈이 들어온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며 “밀양 화훼단지 농민들의 경우 돈을 받아 점당 1만원짜리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올해 감사원의 감사결과에서도 파행집행 사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경남 함안군 등 4개 시·군의 경우 지난해 쌀 전업농을 위해 지원해야 할 자금 7억2천여만원을 비닐온실 사업자 5명에게 전용했다.

전남도는 도시지역에 땅을 갖고 있는 농민들을 영세농으로 분류해 1억7천4백만원의 자녀 학자금을 지원했고,옥천농협은 농산물 가공산업 지원금 5천3백여만원을 한 영농조직 대표의 채무 상환금으로 부당 대출했다.

◇사후관리 엉망=농림부·지자체·농협 등 농정당국은 정책자금 지원 농가에 대해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는지 지도·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경북 상주의 한 단위농협에서 최근 퇴직한 朴모(52)씨는 “일단 돈이 풀리면 사후 관리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털어놨다.생산과잉이 되든 말든 생산이후의 문제는 농민들이 떠맡아야 했고 정책자금이 용도외로 쓰이는 경우 농어촌발전심의위에서 농협으로 회수통보를 하도록 돼 있지만 그런 일은 한 건도 없었다는 것이다.

1인당 최고 5천만원까지 지원하는 농어민 후계자의 예를 보자.

한국농업인경영연합회(韓農)대외협력실 나정환 대리는 “12만명의 농어민 후계자 중 대부분이 시설농에 뛰어들었다가 평균 3천만원이상의 부채를 졌다”며 “지역별 특성과 유통문제를 감안않고 정부가 무더기로 시설농업 지원에 나서 부실농가를 양산했다”고 말했다.

전농측은 대관령·평창 지역에 대규모의 유리온실을 지원해 폭설에 주저앉은 경우나 일조량이 부족한 구미 옥성화훼단지 6만평 4백억원을 지원한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전농 이종화 정책실장은 “시설채소 재배 면적의 경우 지난해 말 90년의 두배(5만2천8백93ha)로 증가,생산과잉 사태가 벌어져 농민들이 투자비용을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도덕적 해이=충남 서천군에서 5천평 규모의 논농사를 짓는 金모(58)씨는 3년전 농협에서 5천만원을 빌려 아들(30)사업자금으로 지원해 주었다.金씨의 아들은 이 돈으로 당구장을 차렸으나 망한 뒤 행방을 감추는 바람에 金씨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있다.

경남 진주시 문산읍에서 배 과수원 6천여평을 경영하는 李모(40)씨도 2년전 배나무 수종 교체용으로 대출받은 4천여만원에다 2천여만원을 보태 건평 30평짜리 새집을 지었다.

이밖에 金모(58·충남 논산시 연무읍)씨는 86년부터 양돈축사 건립 명목 등으로 수차례에 걸쳐 3억여원의 정책자금을 빌렸지만 한푼도 갚지 않고 있다.金씨는 최고급 승용차 ‘다이너스티’를 몰고 다닌다.

[특별취재반]

경제부〓이효준.송상훈 기자

전국부〓정기환.양영유.구두훈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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