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전반 깊숙이 관여 … ‘비토’도 많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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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008년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의 이사회 회의장. 중국 베이징에 사옥을 매입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쉽게 통과될 것 같았지만 한 사외이사가 “주변 건물의 공실률 등에 대한 조사가 부족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이어지자 이사회 의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자료를 보완해 다시 보고하라”고 교통정리를 했다. 결정은 다음 번으로 미뤄졌다고 한 사외이사가 전했다.

같은 해 9월 SK에너지 이사회. 포스코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문제로 논쟁이 붙었다. 사외이사들이 주로 반대했다. “국제 금융상황이 지금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주장도 나왔다. 회사는 결국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았다.

SK그룹이 외국계 자본인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하며 선임한 사외이사의 상당수가 6년 임기를 마치고 다음 달 물러난다. 그룹의 주력사인 SK에너지는 12일 이사회를 열고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과 이재환 전 삼성BP화학 사장, 최혁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를 사외이사 후보로 결정했다. 퇴임자는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4명이다. SK㈜도 이날 새 사외이사 후보를 뽑았다.

다음 달 SK에너지의 사외이사에서 퇴임하는 서울대 김태유(산업공학) 교수는 “SK그룹의 사외이사로 일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회의장 자리만 채우는 게 아니라 경영 전반에 깊숙이 참여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SK에너지의 경우 이사회 구성원 10명(다음 달부터는 9명) 중 사내이사는 최태원 회장을 포함해 3명뿐이다. 전체의 3분의 2인 사외이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경영진 교체까지 요구할 수 있는 구조다. 다른 계열사도 사외이사 비율이 절반을 웃돈다.

이사회 밑에 여러 소위원회가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사회에 올라갈 안건은 사외이사들이 위원장을 맡은 전략위·투명경영위 등의 소위가 1차로 거른다. 반려되는 안건도 상당수다. 주요 계열사에는 주로 사외이사를 보조하는 이사회 사무국이란 조직도 있다.

SK그룹은 2003년 소버린과의 분쟁 및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로 홍역을 겪은 뒤 지배구조 개선에 나섰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주주·이사회가 의사결정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아무리 경영권 방어에 좋은 것도 시장이 원치 않으면 안 한다”고 말했다.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과 사외이사 강화는 ‘시장의 뜻’에 따른 것이란 얘기다.

다음 달 퇴임하는 남대우(72) SK에너지 사외이사는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소버린과 SK 양쪽 모두의 추천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SK에너지가 윤활유 사업을 SK루브리컨츠로 분사할 때 “상장기업이 지분을 모두 가진 비상장회사를 만드는 건 투명경영에 맞지 않다”며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SK 경영진의 이사회 중심 운영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최태원 회장은 이사회에서 자기 주장을 거의 하지 않고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도록 했다”며 “젊은 분(50세)이 상당히 수양이 됐더라”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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