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밸리는 지금] 벤처기업들에 싸늘한 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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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닷컴기업 A사는 최근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새 사무실 건물주가 임대계약서 외에 다른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벤처기업은 위험한 것 아니냐며 재무구조.지분관계까지 꼬치꼬치 캐묻고 심지어 이사회 회의록까지 보자고 하더라는 것.

이 회사 신모(36)사장은 "마치 뜨내기를 대하는 것 같은 건물주의 시선을 받고 벤처기업의 위상을 절감했다" 며 씁쓸해했다.

한국 벤처신화의 발원지였던 T밸리가 이제는 싸늘한 시선으로 벤처기업들을 내몰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벤처' 간판만 걸면 임대료의 일부를 주식으로 대신 받아주기까지 했던 건물주들이 이제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며 닷컴기업을 멀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싼 청담동.압구정동.신대방동으로 옮기거나 아예 서울을 떠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

늘어나는 빈 사무실과 떨어지는 임대료로 몸살을 앓기는 건물주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3분기 0.4%에 불과하던 강남지역 사무실 공실률이 4분기에는 0.65%로 치솟았다.

이면도로의 작은 빌딩에는 빈 사무실이 몇달째 방치된 곳도 적지 않다. 임대료도 연초에 비해 평당 1백만원 정도씩 떨어졌다.

무엇보다 T밸리의 풍경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대기업이나 외국계 IT회사들, 각종 금융기관이 닷컴기업의 빈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청담동의 한 벤처기업 대표는 "번잡하고 화려한 테헤란로 일대는 사실 막 창업한 벤처가 자리잡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며 "벤처기업이 거품섞인 '묻지마 투자' 로 번듯한 사무실을 꾸리던 시대는 지났다" 고 말했다.

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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