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5) 이상한 ‘사수 명령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파주 봉일천 저항선에 각 부대가 대부분 도착해 방어에 들어갔다. 26일 밤에는 임진강 다리 폭파에 실패했던 공병대대가 결의에 찬 준비를 했다. 21명의 자원 특공대를 조직해 적의 야간 기습 때 탱크에 뛰어들 결의를 한 것이다. 이들은 전원이 유서를 쓴 뒤 문산 남쪽 도로변에 호를 파고 들어가 기다렸다. 특공대원의 품에는 TNT 묶음 속에 수류탄을 넣은 자폭용 폭탄이 들어 있었다. 적 탱크가 나타나면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 그 속에 뛰어들자는 비장한 결의였다. 임진강 다리 폭파 실패에 대한 책임감에서 우러난 충정이자 투혼이었다. 그러나 밤에 적의 탱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탱크 폭파 대신 선두에서 내려오던 적의 정찰병들을 기습해 소화기 10여 점을 노획한 뒤 봉일천 전선으로 귀환했다.

날이 밝자 적의 공격이 본격화했다. 전차 25대가 국도를 따라 내려왔고 널따랗게 형성된 평원지역을 따라 적의 보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지 앞에서 나는 적의 전차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저 멀리 포신을 하늘 쪽으로 향한 커다란 쇳덩이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망원경으로 확인해보니 틀림없는 적의 전차였다. 봉일천 저항선 뒤편에 있던 노재현 소령의 포병대대는 정확한 사격으로 이들 전차를 저지했다. 정확하게 가해지는 포격에 적의 전차가 주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육탄돌격도 이어졌다. 증원을 위해 도착한 15연대도 육탄 돌격 대열에 합류했다. 적의 포격을 뚫고 이들은 용감히 앞으로 나아갔다. 적 전차에 하나 둘씩 뛰어들면서 이들은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으로 적들은 봉일천 저항선으로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오후에 김홍일 소장이 민기식 대령을 대동하고 사단을 방문했다. 육군본부 전략지도반 반장의 자격이었다. 전황보고를 듣던 김 소장은 “1사단이 대단하다. 정말 잘 싸웠다”고 칭찬했다. 그는 그러나 “의정부 쪽 7사단이 무너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저항을 그치고 한강 남안으로 철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제 맘대로 후퇴할 수는 없잖습니까”라며 육본으로 돌아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후퇴허가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며 급히 육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저녁 늦게 내가 받아 본 것은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서였다. 육본에서 한 장교가 지프를 타고 나타나 참모총장 명의의 명령서를 전달했다.

참전 위해 수송선 탄 미군 6·25전쟁 발발 직후 미국 행정부는 미 본토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 참전을 명령했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군장을 갖춘 미군들이 1950년 6월 말께 수송선에 올라 대기하고 있다. [중앙포토]

후퇴는 당연히 생각해 볼 사안이었다. 탄약과 포탄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김홍일 소장의 생각이 맞았다. 내 생각도 그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작전의 총책임자인 육군참모총장이 사수명령을 내렸으니 이에 따라야 했다.

나중에 시흥보병학교에서 만난 김홍일 소장은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알려줬다. 육본으로 돌아온 김 소장이 채 총장에게 1사단 철수를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총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김 소장은 아예 전화기를 들어 총장에게 들이대면서 철수 명령을 내리라고 간곡하게 말했으나 결국 총장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28일 새벽 2시30분쯤 육본 명령으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동했다. 국군 7사단 정면을 파고들어 의정부에 진입했던 북한군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당시 전선에 있던 나는 이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마지막 힘까지 다 기울여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는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는 사단 참모들에게 문산 탈환을 목표로 반격하는 작전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28일 아침에 탄약 보급을 받으러 부평 쪽으로 떠났던 사단 군수 참모 박경원 중령이 빈 트럭으로 돌아와 암담한 소식을 전했다. “서대문 녹번리까지 적이 벌써 진입해 있었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보고였다. 서대문 형무소 죄수가 풀려나고 거리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앞만 보고 싸우고 있는데 후방은 아무 전갈도 없이 철수한 것이다. 포병대대장 노재현 소령이 “포탄이 다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그 순간 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앞에 있던 노 소령을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또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백선엽 장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