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자 적의 공격이 본격화했다. 전차 25대가 국도를 따라 내려왔고 널따랗게 형성된 평원지역을 따라 적의 보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지 앞에서 나는 적의 전차를 처음으로 목격했다. 저 멀리 포신을 하늘 쪽으로 향한 커다란 쇳덩이가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망원경으로 확인해보니 틀림없는 적의 전차였다. 봉일천 저항선 뒤편에 있던 노재현 소령의 포병대대는 정확한 사격으로 이들 전차를 저지했다. 정확하게 가해지는 포격에 적의 전차가 주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육탄돌격도 이어졌다. 증원을 위해 도착한 15연대도 육탄 돌격 대열에 합류했다. 적의 포격을 뚫고 이들은 용감히 앞으로 나아갔다. 적 전차에 하나 둘씩 뛰어들면서 이들은 장렬하게 산화했다.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희생으로 적들은 봉일천 저항선으로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오후에 김홍일 소장이 민기식 대령을 대동하고 사단을 방문했다. 육군본부 전략지도반 반장의 자격이었다. 전황보고를 듣던 김 소장은 “1사단이 대단하다. 정말 잘 싸웠다”고 칭찬했다. 그는 그러나 “의정부 쪽 7사단이 무너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저항을 그치고 한강 남안으로 철수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제 맘대로 후퇴할 수는 없잖습니까”라며 육본으로 돌아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후퇴허가를 받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그렇게 하겠다”며 급히 육본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저녁 늦게 내가 받아 본 것은 ‘현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서였다. 육본에서 한 장교가 지프를 타고 나타나 참모총장 명의의 명령서를 전달했다.
나중에 시흥보병학교에서 만난 김홍일 소장은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알려줬다. 육본으로 돌아온 김 소장이 채 총장에게 1사단 철수를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총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김 소장은 아예 전화기를 들어 총장에게 들이대면서 철수 명령을 내리라고 간곡하게 말했으나 결국 총장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28일 새벽 2시30분쯤 육본 명령으로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동했다. 국군 7사단 정면을 파고들어 의정부에 진입했던 북한군은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입했다. 당시 전선에 있던 나는 이런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마지막 힘까지 다 기울여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는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는 사단 참모들에게 문산 탈환을 목표로 반격하는 작전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28일 아침에 탄약 보급을 받으러 부평 쪽으로 떠났던 사단 군수 참모 박경원 중령이 빈 트럭으로 돌아와 암담한 소식을 전했다. “서대문 녹번리까지 적이 벌써 진입해 있었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보고였다. 서대문 형무소 죄수가 풀려나고 거리에는 적기가 휘날리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는 앞만 보고 싸우고 있는데 후방은 아무 전갈도 없이 철수한 것이다. 포병대대장 노재현 소령이 “포탄이 다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그 순간 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앞에 있던 노 소령을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또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백선엽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