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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미셸 리, 한국의 하이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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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셸 리가 2007년 워싱턴DC 교육감에 임명된 뒤 그곳 교육을 바꿔 놓았다. 언론은 “거대 조직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다”며 우려를 표명했지만 보기 좋게 기우(杞憂)로 돌려놓았다. 학교 23곳을 폐교시키고 교장 36명, 교사 270명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소송에 휘말렸어도 억척스럽게 버텨 냈다. 그녀의 승리는 동시에 그녀를 임명한 에이드리언 펜티 워싱턴 시장의 승리였다. 무려 30명의 교육감 후보자 중에서 정말 탁월한 선택을 했다. 최대의 수혜자는 물론 ‘눈 밝은’ 시장을 뽑은 워싱턴 유권자들이다.

국회 교과위가 의결한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을 좀 더 뜯어보자. 교과부 공무원 등 일반직에도 교육감직 문호를 개방한 것 말고 몇 가지 변화가 더 있다. 시·도 교육의원을 이번 6·2 선거에서만 주민 직선으로 뽑고 다음 지방선거부터는 뽑지 않기로 했다. 이른바 일몰제(日沒制)다. 교육감·교육의원 후보의 당적 보유 금지 기간을 종전의 2년에서 1년으로 완화했다. 다음 선거부터는 교육감 출마 자격 요건(교육 경력)을 없애기로 했다. 눈에 띄는 것은 교육감 입후보 자격 폐지뿐이다. 그나마 다음 선거가 다가오면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결국 이번 개정안에 환호할 사람은 일반 학부모보다는 출마 자격을 따낸 교과부와 시·도 교육청 간부들이다. 정당 경력 제한이 1년으로 줄었으니 정치인들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을 것이다. 어차피 폐지될 교육의원 직선제를 왜 이번에만 살렸을까. 교육 관련 단체들의 입김 때문일 것이다. 희한한 일인지 당연한 일인지 헷갈리지만 밥그릇이 걸린 문제에는 여도 야도, 진보도 보수도 없다. 교육위원회와 지방의회를 통합한 현 지방교육자치법이 추진될 때 교총·전교조 등 교육 관련 단체들은 한 몸이 돼 반대했다. 천막농성을 하고 삭발식도 했다. 이번 개정 때도 목소리가 컸다. 우리나라의 ‘교육 자치’가 실은 ‘교원 자치’에 불과하다는 세간의 지적에는 왜 귀 기울이지 않는가 모르겠다. ‘그들만의 교육 자치’에서 웬 비리·부패와 이념 편향 논란이 그리도 많이 빚어지는가.

다행스럽게 우리나라에도 무기가 있다. 미셸 리는 없지만 ‘하이힐’이라는 강력한 국산 무기가 있다. 인천지방법원이 지난해에 “일반 상해죄보다 처벌이 무거운 폭력행위처벌법을 적용해야 한다”며 ‘흉기’로 새로 규정한 물건이다. 지난해 12월 3일 밤 동료들과 술을 마시던 서울교육청 소속 여성 장학사가 흉기라는 점을 깜빡 잊고 하이힐로 남성 장학사의 머리를 때렸다. 폭행사건은 장학사 뇌물 수수 비리로 확대됐다. 여성 장학사가 홧김에 자신과 다른 교사들이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의 뇌물을 건넸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공사 수주, 방과후 학교 운영업체 선정 등을 둘러싸고 비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한쪽에서는 어린 학생들의 두발·복장·휴대전화에 ‘자유’를 주자는 얼치기 좌파 실험이 한창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하이힐의 뾰족한 굽에 부패 청산과 교육 개혁의 막중한 임무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아마 수만 켤레가 동원돼도 모자랄 것이다). 사람도, 뽑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외부에 문호를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한국에서도 수십 명의 미셸 리가 나타나 교육계에 충격을 줘야 한다. 그럴 제도적 여건을 시급히 만들어야 마땅하다. 지금 같은 폐쇄적인 구조에서는 아이들만 불쌍해진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