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원망의 대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며칠 전에 보도된 사건이다. 50여명이 탄 버스 안에서 한 여자승객이 손지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소매치기야!" 라고 외쳤다.

휴대폰을 든 다른 승객이 112에 신고하고, 버스는 경찰서 마당으로 옮겨졌다. 모든 승객이 소지품을 다 내놓는 소동을 벌였지만 지갑은 나타나지 않았다.

승객 전원이 오전 9시라는 중요한 때에 예정지에 가지 못하는 손해를 보았다. 승객들은 범인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됐다.

요즘 수천억원을 꿀꺽 삼킨 불법대출 사건의 주역과 조역들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친다. 금융감독원의 책임자는 앞으로도 불법을 저지른 신용금고가 한두 개 더 적발될 것이라고 한다.

추가 공적자금을 논하는 시점과 맞물려 신용금고 운영과 감독의 허술함이 드러나니 국민은 바보가 되거나 도둑맞은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여기서 나라를 버스로 친다면 소매치기범과 지갑, 그리고 지갑이 간 곳을 찾지 못하는 형사들은 누가 될까. 저 버스에서 승객들은 피해자를 원망했었다.

불법대출 사건과 관련해 국민은 누구를 원망하게 될까. 나라 경제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들이 잘 해보고 싶은 의욕이 없거나 머리가 나쁘거나 개인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자신들이 염불처럼 외우던 '구조조정' 을 미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외국 경제전문가들의 진단을 인용하면서 과감히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나라 경제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도 머뭇거리면서 오늘의 위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그 근본적인 원인이 '선거' 에 있음을 알고 있다.

선거때문에 자기 정파 지지층의 표심을 의식해 과감히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다. 노사간의 이면계약설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은 불법대출 그 자체보다 그것이 선거를 치르는 정치권의 돈줄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을 갖기 때문에 더욱 속 상해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정치인들에게 정권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국민을 위해서 일만 열심히 하라고 주문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요구이다. 표심을 의식하지 않고 일해야 나라에 이익이 되겠지만 그렇게 하는 이는 정치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게 된다.

역사를 돌아보면 정권 때문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다. 표심을 살피지 말고 일만 하라는 것은 정치에서 손을 떼라는 말과 같다. 결국 선거 준비가 나라를 어렵게 만드는 셈이다.

저 버스의 승객들이 소매치기 피해자를 일차적 원망의 대상으로 지목하기는 쉬웠다. 같은 식으로 불법대출이나 경제적 난국을 보고 현 정권을 원망의 대상으로 지목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버스와 나라에서 우리가 참으로 원망해야 할 뿌리를 찾은 것은 아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범이나 승차 인연 자체가 진짜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나라에서도 개인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 찬 표심, 그리고 지금의 제도나 국민의식으로 선거를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원망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저 버스의 승객 가운데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이 담담하게 눈앞의 현실을 관조(觀照)하는 이가 없지 않을 것이다.

불평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사태를 여실히 관찰하면서 국민 전체가 합심해야만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장래의 선거에서 누가 정권을 잡든지 나라를 살려놓고 봐야 한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