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서 아이티까지 … 국경 없는 구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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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재난구호회 김성기(61) 단장은 그를 포함해 일반인 세 명으로 구성된 ‘아이티 구조단’을 이끌었다. 그는 아이티에서 지난달 20일부터 보름간 현지 구조 활동을 펼쳤다. 모두 15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무너진 성당 건물을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해 입구에 포개진 채 숨진 시신 세 구를 수습하는 장면은 AP통신사 기자가 찍은 사진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포르토프랭스는 지난달 12일 새벽(현지시간) 규모 7.3의 지진 피해를 보았다. 아이티 정부는 사망자만 2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폐허가 된 포르토프랭스 현장은 참혹했다. 순식간에 닥친 재앙을 피하지 못해 안타깝게 사망한 희생자들은 주저앉은 건물에 깔려 악취를 내뿜었다. 도착 이튿날 한 현지 여성이 구조단을 급하게 불렀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가 2층 건물에 남아 있다고 했다. 건물이 무너질까 봐 아무도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건물에 들어서니 구멍이 뚫린 2층 천장에 늘어진 사람의 상반신이 보였다.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콘크리트 더미를 해머로 깨고 유압잭으로 천장을 들어올렸다. 얽힌 철근은 커터로 잘라냈다. 6시간의 작업 끝에 시신을 수습했다. 아버지는 두 돌 된 아이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김씨는 “재난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 보면 희생자의 안타까운 사연에 마음이 숙연해진다”고 했다. 먼 나라에서 온 동양인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현지 주민들은 이들의 활약상을 눈으로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 단장은 재난 구조 경력 15년의 베테랑이다.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부터 활동했다. 당시 TV로 사고 현장을 지켜보던 그는 뭔가 돕고 싶어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현장에는 소방구조대 대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 단장은 그 자리에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소방구조대원이 철수하자 민간 구조대원들에 섞여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들고 간 장비는 호미·나무톱·펜치, 그리고 노끈이 전부였다. 하지만 50여 명의 민간 대원들이 힘을 합치자 한 시간에 한 구 정도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직장이었던 대한전선에 월차·연차를 내고 밤새도록 현장을 지켰다. 김 단장은 “당시 유족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생존자를 구하지 못하고 시신만 수습하는 일이 있더라도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아이티 구조단’ 김성기 단장(오른쪽 흰 방재복)과 단원들이 아이티 대지진으로 무너진 성당 잔해에서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후 김 단장은 재난이 터지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갔다. 96년 파주·문산 물난리, 2002년 김해 비행기 추락 사고, 2003년 마산 태풍 피해 현장 등 구조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는 그가 있었다. 2008년부터는 세계재난구호회에 합류했다. 지진이 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과 중국 쓰촨성, 태풍 피해를 본 대만 가오슝 지역 등 해외 구호에도 나섰다. 평소에는 구조 장비를 연구하는 데 매달렸다. 독일·일본 업체의 제품을 분석하고 손수 새로운 장비를 개발하기도 했다. 김 단장은 “현재 보유한 장비 가격만 1억원이 넘는다”고 말했다.

그의 부모는 서울 마포에서 식당을 했다. 하루에 냉면 2000그릇을 팔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부모님은 빌딩을 사 세를 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일곱 남매 중 막내였던 그도 유산을 물려받았다. 김 단장은 “재난 현장 다니고 장비 사들이면서 재산을 거의 다 털어먹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처음엔 가족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남의 나라 일까지 달려가 시간과 돈을 쓰느냐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에 가족들도 마음을 열었다. 그는 “지금은 아내와 두 딸도 ‘몸조심 하라’며 내 활동을 이해해 준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해외 구호 활동을 하면서 아직 생존자를 구해낸 적이 없다. 항공기를 예약하고 짐을 꾸리는 데만 이번처럼 며칠씩 걸려서다. 김 단장은 “정부 차원에서 해외 구호 활동을 지원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재난구호회(www.wdro.org)는 세계 각지 재난현장에 구조단을 파견해 구호 활동을 벌이는 국내 민간단체로 1999년 설립됐다.

이정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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