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압록·두만강 대탐사] 15·끝.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15. 끊어진 땅끝 … 강은 하나로 흘렀다

국경에 대한 우리의 첫 이미지는 신의주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유람선을 타고 다가가 건너다보는 신의주는 한없이 평화스러웠다.

폐선 위에서 낚시질하는 사람,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달리는 소년들,한결같이 평화스러웠다.

그 평화스러움은 우리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드는 그들의 얼굴에서도 느껴졌다.초소 하나,총을 멘 군인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50년이라는 분단의 세월이 마치 거짓이듯,배를 대고 올라가면 그들은 웃으면서 다가와 “어서 오라요”하면서 손을 잡아 끌것만 같았다.

이 언덕을 넘어가면 백석(白石) 시인이 주인을 붙였던 “목수네 집현 삿을 깐”도 그냥 있을 것이었다.

경의선이 복원되어 기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되면,나는 먼저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을 찾아 들어가,어디선가 만난 일이 있는 것처럼 낯익은 사람을 잡고 ‘심장에 남은 사람’을 청해 들으리라.지난밤 저녁을 먹으면서 북한의 복무원으로부터 듣던 노래이다.

그리고 십리를 걸어가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같은 선각자들이 새로운 문물에 접하기 위해 중국을 드나들면서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통군정(統軍亭)도 올라야지,생각만으로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국경인 압록강은 철조망 하나 없는 평화의 강이요 선조들의 굵은 발자국이 찍힌 그리움의 강이었다.

중국의 강변 도시 지안(集安)에서 바라보던 밤의 국경도 잊을 수가 없다.추석날 밤,보름달은 하늘 높이 떠 있고,두 나라 사이를 가르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속에 미루나무는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강건너 만포선의 끝 만포의 작은 강마을,두어 집 불빛이 희미하고 개가 킹킹 지지러지게 짖는 것으로 보아 어느 집에 마실꾼이 든 모양이었고,이쪽 강언덕은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로 붐볐다.

우리들은 한참 강뚝을 건다가 등을 밖에 내건 대포집에서 술을 마셨는데,우리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임을 알고 일부러 조용필을 틀어주는 말이 통하지 않는 키가 큰 젊은 주인이 어쩐지 고구려 후예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밝은 날 보는 지안의 압록강은 달빛 아래 보던 압록강에 결코 못지 않았다.

이 물을 마시며,이 물에 몸을 씻으며,이 물로 농사를 지우며 사는 사람들이,이쪽이고 강건너고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으랴.

돌아보니 옛날 이 지방에서는 강 이쪽과 저쪽이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아이들은 으레 함께 어울려 헤엄을 치고 썰매를 탔으며,어른들도 어른들대로 함께 농사짓고 물건을 사고 팔았다는 것이다.

국경인 압록강은 한 때는 나라와 나라를 가르고 사람과 사람을 떼어놓기보다는 서로 만나게 하고 마주치게 하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는 소리였다.

‘고구려주의자’이던 신채호(申采浩)가 여러 번 찾아가 눈물과 한숨으로 돌아보았다는 고구려의 옛서울 지안의 유적을 더듬는 감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장군총이며 광개토왕비 등 이름있는 유적은 그만두고라도,금방 눈에 띄는 집채만한 고분들이 백 수 기요 시내에 널려 있는 것을 온통 고구려적 삶의 흔적들이었다.

어떤 성벽은 남의 집 뒷담이 되어 있고 또 어떤 성벽은 부근 아파트 주민들이 텃밭으로 이용,고추도 심고 파도 심는다.고구려라는 강성한 나라를 가졌던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이 고장을 나라 안에 가지고 있었다면 저렇게 유적들,유물들을 버려두지는 않았으리라는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왜 고구려는 저 넓은 만주 벌판을 버리고,다시 이 압록강변의 기름진 땅을 버리고 강을 건너 반도 속으로 움추러들었을까.야속한 생각도 들었지만,생각해 보면 바로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남았는지도 모른다.

가령 고구려가 당(唐)을 이기고 중원을 차지했더라면 고구려 스스로 한문화에 동화하여 마침내 우리 민족도 말도 없어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싱거운 공상에 지나지 않을까.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이웃해 있으면서 살아 남았다는 일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뛰어남을 말해 준다는 동행 교수의 말은 매우 호소력있게 들렸다.

두 번 마주친 뗏목도 우리에게서는 지울 수 없는 국경의 이미지였다.북한의 혜산에서 내려와 중국의 린장(臨江)까지 간다고,목청을 높여 허술한 인민복 차림의 사공은 대답했는데,나는 그 공연히 주눅들고 기죽어하는 모습에서 우리들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다.

중강진이 머지 않은 강에서 빨래를 하던 여인들,멱을 감던 소년들도 국경 압록강에 오버랩되어 오는 그림들이다.

그들은 50년이나 떨어져 있다가 멀리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 강건너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말을 붙이는 남쪽 사람들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다.오히려 오래만에 만나는 이웃 아저씨를 대하듯 반가워했고 남은 길이 먼 것을 걱정했다.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막판 백두산에 오를 때는 문화국에서 군인이 나와 우리를 안내했다.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아깔나무,가문비나무,지작나무 숲을 외돌아 올라 메운 바람이 부는 정상에 이르렀을 때 중국 군인은 차에서 내려 마구 달려가려는 우리를 제지했다.

바로 발 앞을 가리키며 그쪽은 조선땅이니까 들어가면 안된다고 말했지만,그곳엔 초소도 초병도 없었다.다만 내려오면서 보니 천명의 군인이 서 있는 것 같아 이름붙여진 천군계곡 뒤로 군인 복장의 젊은이 두엇이 서서 물끄럼히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북쪽 땅을 밟을 뻔한 곳은 또 있었다.단둥(丹東)에서 환런(桓仁)으로 가는 도중 야오닝성(遼寧省) 구러우쯔샹(古樓子鄕)이라는 곳에서였다.버드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강가 수만 평 모랫벌에 4구의 경계비가 서 있었는데,이곳은 국경으로 삼고 있는 압록강 북쪽에 해당했다.

원래 강 남쪽으로 조선 땅이었는데 90년대 대홍수 때 강줄기가 바뀌어 북쪽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북조선 당국은 회담을 통해 땅을 다시 찾았고 부랴부랴 경계비를 세웠지만,중국 사람들이 이 땅을 자유스럽게 드나들며 사용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이곳에도 철조망이나 초소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도 볼 수 없던 철조망을 두만강을 거의 다 내려가 볼 수 있었다.톱니바퀴처럼 들쑥날쑥 뒤엉켜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선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국경선을 따라 달리는 길가로 길게 철조망이 쳐져 있었던 것이다.

딸기나무가 우거진 두만강은 장마로 물이 전에 없이 아름다웠다.두만강은 중국과 북조선을 가르며 흐르다가 하류에 이르러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사구(砂丘)와 고니 흰 두루미 등이 한가하게 노니는 석호(潟湖)를 발달시키고,마침내 러시아까지를 받아들여 새 나라의 국경이 되는데,그끝 동해가 보이는 망해각에서 듣던 닭울음소리도 우리는 국경의 이미지에서 제외할 수가 없다.

누구는 소련땅에서 들렸다 하고 또 누구는 중국땅에서 들렸다 했지만,나는 그것이 분명 조선땅에서 들려오는 그립고도 안타까운 우리 조선닭의 울음소리 같기만 했다.

신경림<시인>

[답사자 명단]

◇ 국내 : 신경림(시인), 원종관(강원대 교수.지질학), 김주영(소설가),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승효상(건축가), 이종구(화가), 송기호(서울대 교수.발해사), 김귀옥(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 여호규(전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고구려사)

◇ 현지 : 유연산(중국 옌볜작가), 안화춘(옌볜 사회과학원 연구원.독립운동사)

◇ 중앙일보 : 장문기(사진부 기자), 정재왈(문화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