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이면합의' 진실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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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와 금융노련간의 이면(裏面)합의설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지난 7월 금융 총파업 타결 때 노정(勞政)이 공식합의 외에 몇가지 밀약을 했다는 것이다.

이용득(李龍得) 전국금융산업노조 위원장이 한 인터뷰에서 "노.정간 이면합의가 있었으며 정부가 이를 무시하고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강행할 경우 폭로하겠다" 고 밝힘으로써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금융감독위원회는 펄쩍 뛰며 부인하고, 李위원장도 "지금으로선 확인해 줄 수 없다" 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면합의설이 사실이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소문대로 금융지주회사를 재벌이나 외국계에는 안 넘기고 고용안정도 보장키로 했다면 이는 금융 구조조정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부실 은행들을 지주회사로 묶는 2차 금융개혁의 밑그림부터 잘못됐다는 지적이 많다. 이런 판에 핵심인 조직 및 인력 감축도 하지 않기로 미리 각본을 짰다면 금융개혁에 40조원은 고사하고 훨씬 더 많은 공적자금을 추가 투입해도 결과는 뻔하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면계약 문제는 노정간 공방 정도로 적당히 넘길 일이 아니라 철저히 파헤쳐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우선 李위원장은 정말 이면계약이 있다면 이를 속히, 구체적으로 공개할 것을 촉구한다.

정부도 명문화된 문서가 아니라 구두(口頭)합의라도 있었다면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밝혀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말 없었다면 이번 기회에 의혹을 말끔히 씻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믿고 금융 구조조정 계획이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국회도 추가 공적자금 동의에 앞서 우선 이 문제에 대한 실상부터 밝혀내야 할 의무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 걸쳐 이면계약이 기승을 부리면서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대우자동차의 부도도, 전 경영진이 노조와 맺은 '인력조정을 하지 않겠다' 는 이면계약에 발목을 잡힌 탓이 크다.

몇몇 국책은행과 공기업의 경영 부실에는 낙하산 인사 수용 대가로 이뤄진 이면계약들이 한몫했고, 대기업들이 맺은 외국과의 이면계약들이 하나둘씩 드러나면서 주가 폭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행위들은 사실상 정부가 국민과 주주를 속이는 야바위 놀음이다.

정부가 당장 처리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한국전력 노조가 오늘부터 파업에 들어가기로 돼있고 금융.건설업 노조를 비롯, 한국노총.민주노총 등이 대규모 공동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원칙에 충실한 모습을 견지해야 한다. 잠시 위기를 모면하려고 겉다르고 속다른 짓을 한다면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우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는 점에서 국민의 강한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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