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新 강호제현(江湖諸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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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983년 7월 31일. 전국 주요 신문에는 '강호제현(江湖諸賢)께 알리는 말씀' 이란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김철호(金澈鎬)명성그룹회장의 호소문이었다. "명성(明星)은 거듭되는 세무조사를 45일여동안 치르고 있습니다" 로 시작된 이 글은 "한 기업이 이렇듯 의욕과 용기와 기업이상까지 무참히 짓밟힘을 당하는 현실을 통탄한다" 고 적고 있다.

*** 기업의 국세청 비난광고

겉으론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것이었으나 내용은 누가 봐도 국세청을 정면공격하는 글이었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당시의 국세청은 기업의 생살여탈권을 쥔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이런 국세청을 상대로 일개 신흥기업이 도전장을 던졌으니 그 충격은 엄청났다.

국세청은 발칵 뒤집혔고 안무혁(安武赫)청장은 총력전을 지시했다. 조사요원은 50명에서 1백명으로 늘어났고 베테랑들이 투입돼 이 잡듯이 뒤졌다.

결국 상업(현 한빛)은행 혜화동지점에서 김동겸 대리가 수기(手記)통장으로 1천억여원의 사채를 조달해 金회장에게 준 사실이 포착됐고, 金회장은 그해 말 벌금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레저업계의 기린아로 각광받던 명성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가 이런 돌출행동으로 국세청을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명성의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는 아직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요즘 새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2000년판 신(新)강호제현…' 이 화제다.

골프가방 메이커인 ㈜재이손(財李孫)의 이영수 사장이 며칠 전 국세청장과 재경부장관을 상대로 '기업을 괴롭히지 말라!' 는 제목의 신문광고를 낸 것.

그는 "10년간 세무보고서를 정직하게 작성해 제출할 때는 가만있다가 갑자기 5억9천만원에 이르는 엄청난 세금을 추징하는 이유는 무언가" 라고 반문하면서 "칼이든 도끼든 총이든 무엇을 들고라도 국세청장이든 재경부장관이든 최고책임자와 결투해 분을 풀고 싶은 심정" 이라고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부었다.

형식과 대상은 같지만 내용은 김철호 회장 때보다 훨씬 강하고 원색적이다.

그의 주장이 어디까지 옳은지는 두고볼 일이다. 모범납세자로 표창까지 받은 그가 탈세했다고 보기도 힘들고 "자본 해외유출 조사중 재이손의 회계장부에 문제가 있어 세금을 고지했다" 는 국세청 해명 역시 일리가 있다.

또 94년 이후 이번이 다섯번째인 그의 광고호소문을 두고 '소영웅주의적 발상' 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을 떠나 아직도 기업인들의 입에서 "정부 때문에 못살겠다" 는 불평이 끊이지 않고, 이것이 많은 국민의 공감을 받는다는 현실을 국세청뿐 아니라 정부 전체가 직시해야 한다.

한국이 기업하기 힘든 곳이란 지적이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세무서나 구청.소방서.경찰서 비위 안맞추고는 장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일관성 없는 노동정책에다 규제는 좀 많은가. 정부는 규제개혁 성과를 내세우지만 감사원.상의 조사결과 50.9%가 '과거와 마찬가지' 또는 '오히려 나빠졌다' 고 응답했다. 잇따라 발표되는 중소기업 지원책들도 '대부분 '탁상공론이거나 립서비스에 그치기 일쑤다.

*** 정부 自省의 계기로 삼길

국세청.금감원.공정위에다 예금보험공사까지 기업 조사권을 갖겠다고 경쟁하는 바람에 모 대기업의 경우 '1년내내 조사받거나 준비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할 정도지만 '괘씸죄' 가 겁나 항변 한마디 못한다.

구조조정의 무원칙도 기업인들을 좌절케 한다. 李사장의 주장이 많은 이들에게 속시원하다는 박수를 받는 것은, 바로 이런 기업인의 불만과 폭발 직전의 국민 정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국세청으로선 당혹스럽기도 하고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 게다. 그러나 기업인의 눈에 비친 국세청은 여전히 세무조사를 '전가의 보도' 처럼 휘두르는 존재란 점은 알아야 한다.

만의 하나-절대 그럴 리야 없겠지만-재이손에 대한 조사에서 명성의 경우처럼 의혹을 사는 일이 생겨선 안된다.

재경부나 금감원.공정위 등도 더 이상 '기업 괴롭히는 곳' 이 아니라 그들이 신바람 나게 뛸 수 있는 여건 조성에 앞장서는 곳으로 탈바꿈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경제도 산다. 제3, 제4의 강호제현 대신 '국세청장님! 재경부장관님! 정말 고맙습니다' 란 광고를 기대한다.

김왕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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