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몸집 경쟁' 어디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한국영화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 20억~30억원을 들인 영화는 웬만해선 눈길을 끌지 못할 정도로 한국영화의 대형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의문점 하나. 덩치가 커진 만큼 속살도 단단해졌을까.

한국영화론 최대 규모인 45억원을 각각 들여 극장가에서 혈투 중인 '단적비연수' 와 '리베라 메' . 지난 11일 동시 개봉한 두 영화의 관객 추이는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쉬리' 의 강제규 필름이 제작해 고지를 선점한 '단적비연수' 는 개봉 첫째, 둘째 주말까지 관객수에서 '리베라 메' 를 크게 앞섰지만 셋째주인 지난 주말엔 순위가 역전됐다.

개봉 첫째 주말 서울관객 17만명을 기록했던 '단적비연수' 의 관객은 지난 주말 5만명대로 주저앉은 대신 '리베라 메' 는 변함 없이 6만명선을 유지했다.

선사시대를 무대로 한 독특한 팬터지 멜로를 표방했으나 난해한 이야기.엉성한 구성 등으로 평단과 네티즌의 집중 공세를 받은 '단적비연수' 가 비교적 드라마가 튼튼한 화재영화 '리베라 메' 에 밀린 이유는 그만큼 관객이 냉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주말까지 전국 관객수는 '단적비연수' 가 1백28만명, '리베라 메' 가 81만명. 비디오 판매권.해외 수출권 등 부가수입을 제외하고 단순히 관객만 놓고 볼 때 2백만명을 확보해야 제작비를 충당할 수 있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밝지 못한 편이다.

그래도 지난달 참패한 화재영화 '싸이렌' 에 비하면 선전하고 있는 셈이다.

40억원을 투자한 '싸이렌' 은 단지 전국 15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국영화의 대형화가 논란이다. 우리 영화의 규모.장르.인프라를 확대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많은 전문가들은 국내 시장상황을 도외시한 투기적 모험이라고 우려한다.

요즘의 영화제작사들은 블록버스터를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사용한다. '비천무' '공동경비구역 JSA' '싸이렌' '단적비연수' '리베라메' 모두 마찬가지다.

한국영화에선 예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스펙터클로 관객을 사로잡겠다는 전략이다.

1998년 한국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표방했던 '퇴마록' 의 제작비가 24억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요즘의 대작들은 투자면에서 두 배 가까이 성장한 셈이다.

돈줄이 마른 다른 분야와 달리 창업투자사.벤처.대형직배사 등의 등장으로 제작비 동원에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된 결과이다.

물론 지난해 대히트한 '쉬리' 가 대형화의 도화선이 됐다. 우리도 충분히 제작비를 투여하면 외국과 경쟁할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뿐만 아니다. 40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갈 작품이 내년에도 '광시곡' '무사'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9 로스트 메모리' '내추럴 시티' '제노사이드' 등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이들 영화를 한국시장이 소화해낼 수 있느냐는 것.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같이 서울 관객 2백만명을 끌어들이는 흥행작을 연속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결국 해외시장을 뚫어야 하나 아직은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작품의 완성도보다 화제성으로 관객을 몰고가려는 지나친 과열 경쟁도 일어났다.

스크린 수십개 확보, 사상 초유의 제작비, 웅장한 스펙터클 등 화려한 홍보문구로 '크게 치고 이내 빠지는' 작전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이즈 경쟁은 결국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자승자박의 꼴이 되기 쉽다.

여기에 최근 세력이 커진 배급사의 압력, 늘어난 스크린을 흥행작 중심으로 운영해 투자비를 회수하려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계산 등이 맞물리며 살 떨리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드라마.구성의 완결성도 숙제다. 말이 블록버스터지 할리우드에 비하면 아직도 턱없이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보는 눈이 높아진 관객을 충족시키기엔 아직 무리다.

화면을 압도하는 볼거리는 적지만 탄탄한 내용으로 호평을 받은 '공동경비구역 JSA' 는 좋은 반면교사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최근의 대작들은 드라마와 스펙터클 가운데 어느 하나를 확실하게 선사하는 경우가 적다" 고 아쉬워했다.

시네월드 정승혜 이사도 "최근 히트한 작품은 제복을 입은 남성영화 일색이다. 사이즈 경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고 말했다.

"한국영화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1980년대 말 동남아를 석권한 홍콩처럼 우리 고유의 장르영화를 개척해야 한다" 는 서울시테마테크 임재철 대표의 충고도 적절하다. 어차피 우리의 1차 시장은 동남아가 될 테니까.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