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 후지모리 처우 놓고 고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페루 의회로부터 해임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은 25일 일본 언론과의 회견에서 부정축재 의혹을 부인하면서 망명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19일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을 마치고 일본에 도착한 뒤 페루 의회에 사직서를 보낸 후지모리는 숙박 중이던 호텔을 빠져나와 친분이 있는 여류작가 소노 아야코(曾野陵子)의 가나가와(神奈川)현 별장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그 곳에서 일본 언론사 기자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의 장기 체류에 따른 페루 내 대일(對日) 비난 여론과 체류자격 문제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회견=후지모리는 부정축재 및 해외송금 의혹과 관련해 "많은 의혹은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세계 어디에도 계좌를 갖고 있지 않다" 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백이 명확한 만큼 조사해 주길 바란다" 고까지 했다.

귀국 시기에 대해선 "페루 정세가 급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아직 결정하지 않았지만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고 밝혔다.

그는 또 "어디에도 망명을 요청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망명은 필요없다" 고 잘라 말했다. 후지모리는 회견 도중 농담까지 하는 등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일본 언론은 전했다.

◇일본 정부 대응=정치적 망명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는 후지모리가 정치활동 재개를 위해 귀국할 뜻을 비친 데 대해 다소 안도하는 눈치지만 여전히 그의 처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일본 이민사의 상징적 성공 사례인 후지모리를 홀대했다간 국내 여론의 비난을 받을 것 같고, 그를 감싸기에는 페루와의 외교관계 및 국제여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페루 검찰당국이 부정축재 등 혐의로 후지모리를 형사소추할 가능성이 가장 큰 두통거리다. 페루와는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아 국내법인 '도망 범죄인 인도법' 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장기 체류할 경우 체류 자격도 문제다. 일본 정부는 일단 "후지모리가 파면됐어도 현재의 사증으로 일시 체류는 가능하다" 는 입장이다.

그러나 장기 체류에는 일본 국적이나 사증 갱신이 필요하다. 후지모리는 회견에서 "양친이 출생 때 페루 주재 일본영사관에 출생신고서를 냈다" 고 말했다. 여건에 따라선 일본에 장기간 눌러앉고 싶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면 후지모리는 지금까지 이중 국적자로 대통령직을 수행한 셈이어서 페루 국내의 비난 여론이 비등할 전망이다. 사증을 갱신해 주더라도 일본 정부로선 비난을 면키 어렵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