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사막 남극을 찾아서](20)세종기지의 불청객 블리자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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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기지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평균 초속 20미터를 넘는 눈폭풍 ‘블리자드’다. 올 여름에는 유독 이 불청객의 방문이 잦다. 필자가 세종기지에 들어온 이후 처음 한 달은 두 번 정도 블리자드가 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주일에 도 두세번 불고 있다. 지난해 여름만 해도 따뜻한 북서풍이나 북동풍이 불어 세종기지 주변 산에 쌓인 눈이 다 녹았다고 한다. 블리자드는 풍속의 변화도 심하다. 약하게 불다가 순간적으로 강해지고 변화무쌍하다. 지금도 숙소 바깥에는 순간 풍속이 최고 27미터에 달하는 블리자드가 휩쓸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초속 50미터를 기록하기도 했다.

필자는 세종기지가 남극 중에서도 위도가 낮은(62도 13분) 곳에 있기 때문에 불과해 여름철에는 블리자드가 불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어렵게 방문한 세종기지에서 남극의 정취를 느끼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지금 필자는 블리자드를 제대로 겪고 있다. 블리자드 속에 섞인 눈 가루는 시야를 가리고 얼굴을 때린다. 안경 없이는 눈을 뜰 수 없다. 세종기지에 갈 때는 얼굴에 딱 달라붙는 선글라스나 고글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충고하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됐다.

눈이 섞인 블리자드가 불면 기지의 건물들과 주변의 바다와 산은 온통 뿌연 눈가루 속에 자취를 감춘다. 시계는 100미터도 되지 않는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건물의 윤곽이 순간순간 눈의 장막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이 쉬어가는 건물 주변에는 사구 모양의 눈 언덕이 만들어진다. 불과 2~3시간만에 30cm 가량의 삼각뿔 형태로 눈이 쌓인다. 얼음이 녹은 물이 흐르던 개울도 눈으로 덮여 평평해진다.

필자는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기 위해 열흘전에 방음이 안되는 숙소동에서 나와 비상숙소에 머물고 있다. 비상숙소는 숙소동과 생활동이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콘테이너 4개를 용접해 만들어 놓은 숙소로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지금 블리자드는 비상숙소를 흔들며 흉폭한 소리를 내고 있다.

블리자드가 부는 날이면 탐사, 관찰, 채집 등 세종기지의 모든 실외작업은 중단된다. 특히 보트운행은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거센 바람에 높은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밀린 서류작업을 하거나 휴게실에 모여 담소을 나누며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린다.

박지환 자유기고가 jihwan_p@yahoo.co.kr

*박지환씨는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에서 기자를 했었으며,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박지환 기자의 과학 뉴스 따라잡기’를 연재했었다. 지난 2007년에는 북극을 다녀와 '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조인스닷컴은 2010년 2월까지 박씨의 남극일기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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