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홀] 첫 디지털 장편영화 '봉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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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영화계에서도 디지털이 부상하고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디지털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감독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지난 16~19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디지털 영화제 '레스페스트 2000' 은 그런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다.

25일 개봉하는 '봉자' (감독 박철수)는 국내 최초의 장편 디지털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일단 한국영화사의 새 장을 연 것으로 보인다.

주로 단편.독립영화로 제작됐던 디지털 영화를 일반 대중에게 좀더 가깝게 만든 것. 올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 는 디지털 카메라를 1백대 동원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봉자' 에선 디지털 카메라(소니 DSR 300 기종) 한 대가 사용됐다. 제작비 3억5천만원. 일종의 저예산 영화다.

디지털 영사기가 없는 국내 극장 사정상 디지털 테이프를 35㎜ 필름으로 옮기는 키네코 작업에 6천만원을 추가했다. 그래도 일반 필름으로 제작했을 때보다 1억원이 넘는 돈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디지털 영화의 핵심은 경비절약이 아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기동성을 살려 일반영화에선 구현하기 어려운 삶의 생동감을 전달해야 한다.

극장용 필름에 비해 아직 화질이 거칠고 깊숙한 맛이 떨어지는 대신 삶의 조야한 측면도 가감없이 찍어대는 실험성이 살아나야 한다는 뜻이다.

'봉자' 는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평소 필름 작업은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엔 디지털에 도전했다" 는 박감독의 말처럼 '봉자' 는 실험성이 돋보인다.

지난해 과감한 성고백서를 펴내 화제가 됐던 서갑숙(봉자)과 신인 김진아(자두)를 내세워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바보 같은 30대 여인 봉자와 어릴 적 당한 성폭행으로 사회에 저항하는 조숙한 소녀 자두의 교감.우정.사랑 등을 그리고 있다.

상업영화에서 다루기 어려운 여성의 비틀린 자아를 누추한 반지하 단칸방을 배경으로 담아냈다.

그러나 '봉자' 는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한 첫 장편영화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자체가 무척 혼동스럽기 때문. 우선 기술적으로 녹음상태가 불량해 작품 감상이 중간중간 끊어지고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분명하지 않다.

사회에서 소외된 두 여인을 그린다는 묵중한 주제와 달리 작품의 분위기는 우스꽝스런 코미디로 흐른 느낌이다.

원초적인 순수성을 간직한 두 여인을 통해 타락한 세상을 비웃어보자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으나 이를 설득력 있게 관객에게 전달하는 영화적 장치는 전혀 정교하지 못하다. 때문에 서갑숙.김진아의 연기에도 별다른 공감이 가지 않는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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