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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169. 레드삭스 '우린 안돼? → 우리도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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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 레드삭스의 커트 실링.

한국시간으로 13일 날이 밝으면 세계 야구팬의 이목이 모일 일이 있다. 뉴욕에서 벌어지는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1차전. 월드시리즈 티켓을 놓고 전통의 두 명문팀이 벌이는 7전4선승제의 첫 판이다.

두 팀의 승부는 누가 이겨서 월드시리즈에 나가느냐가 전부가 아니다. 자연스럽게 거론되는 것이 '밤비노의 저주'다. 1920년 야구 영웅 베이브 루스가 레드삭스에서 양키스로 팀을 옮긴 뒤 양키스는 성(盛)하고, 레드삭스는 쇠(衰)하기 시작했다는. 그래서 1918년 이후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레드삭스가 이번만큼은 우승반지를 차지해 저주의 악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냐는 것. 그게 궁극적인 화두다(양키스는 그 기간 중 몇 번이나 우승했을까. 놀랍게도 무려 스물여섯번이다. 26:0!).

레드삭스 팬들은 저주를 풀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다. '저주 돌려주기 아이스크림'과 '저주 깨기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고, 1918년 루스가 연못에 던져버렸다는 피아노를 건져 올리기 위해 지난 2년간 연못 바닥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최근에는 레드삭스의 강타자 매니 라미레스가 때린 파울 타구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은 리 개빈이라는 소년이 바로 루스가 레드삭스 시절 11년 동안 살았던 그 주소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드디어 저주가 끝났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다 아는 밤비노의 저주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건 사진 한 장에서 그 저주에 대한 해답을 보았기 때문이다. 1차전 레드삭스 선발투수 커트 실링은 11일 훈련 때 가슴에 'Why not us?'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Why not us?'는 '우린 왜 안돼?'가 아니라 '우리도 돼'라는, 그러니까 저주 따위에 휘둘릴 필요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링이 누구인가.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시절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1, 4, 7차전에 선발로 나와 양키스를 꺾었던 주인공이다. 국내 팬들에게 그 월드시리즈는 4, 5차전에서 김병현이 두들겨맞은 아픈 홈런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실링은 그때 가장 중요한 1차전에서 양키스 선발 마이크 무시나를 상대로 기선을 제압했다(이번 1차전 선발도 실링-무시나다).

이번 대결에서 레드삭스의 리더격인 실링이 내세운 '우리도 돼''나도 돼' 정신은 스포츠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동기부여 차원에서 꼭 필요한 메시지라고 본다. '인사이드피치'는 10년 전 LA 다저스에서 연수할 때 메이저리그의 엄청난 완성도를 보면서 속으로 '우리는 멀었어, 안돼'라는 일종의 자괴감에 휩싸였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한번 미국 야구를 현장에서 접하면서 그건 아니었다는 교훈을 얻고 있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노력 여부라고. 스포츠가 주는 진실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그래서 실링의 메시지처럼 '우리도 된다'고. <텍사스에서>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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