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된 일본 내각 불신임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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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역부족이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내각 타도에 나선 일본 집권 자민당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전 간사장의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자민당 비주류인 가토.야마사키(山崎)파는 20일 야당이 낸 불신임안 표결 직전 찬성 입장에서 불참으로 돌아섰다. 주류파와의 힘겨루기에서 세부족을 느끼고 막판에 투항한 것이다.

이에 따라 표결은 야당(1백90석)에 수적 우위를 확보한 자민 주류파.공명.보수당(2백8석)의 부결을 위한 요식행위로 끝나고 말았다.

모리 내각은 일단 신임을 받았고 가토와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전 정조회장은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 주류파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가토의 탈당에 따른 정계개편을 기대했던 야당은 김빠진 모습이었다.

가토.야마사키파가 주류파와의 피말리는 한판 승부를 벌이다 칼을 거둔 것은 가결의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류의 비주류 갈라놓기와 흔들기에 가토는 버티지 못했다.

주류는 불신임안 동조 의원에 대한 제명 카드를 썼다. 불신임안 표결이 기명 투표로 이뤄지는 점을 이용한 전술이다.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 비례대표병립제로 바뀐 마당에 보스와의 의리 하나로 당을 뛰쳐나갈 비주류 의원은 많지 않았다.

실제 표결에 앞서 찬성표를 던지기로 한 가토파 의원은 3분의1에 불과했다. 부결이 뻔한 표결을 강행해봤자 가토.야마사키 본인은 물론 동조자와 다칠 뿐인 상황이었다.

결국 표결 불참으로 "모리는 안된다" 는 뜻을 전하면서 자민당이 깨지는 파국을 막았다. 정책에 밝지만 행동력이 모자라는 가토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가토 반란의 대가는 컸다. 파벌의 일각이 무너져내렸다. 가토에게 파벌을 물려준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대장상과 이케다 유키히코(池田行彦)전 외상을 비롯한 중진 10여명이 딴 살림을 차릴 움직임에 들어갔다. 결전을 다진 소장층을 다독거려야 하는 것도, 자민당류 정치개혁을 기대했던 국민 여론도 부담이다.

가토의 방향 선회는 주류파와의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다. 주류파는 표결 전 가토.야마사키 제명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탈당은 하지 않겠다" 고 공언해온 가토.야마사키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면 탈당사태로 집권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노나카가 가토 반란 이후 "상처를 최소화해야 한다" 고 되뇌어온 것은 이와 맞물려 있다. 공명당도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력히 희망해왔다.

가토의 행동을 지지하는 비율이 54%(마이니치 신문 조사)에 달한 것도 주류의 타협을 재촉한 요인으로 보인다.

불신임안 부결로 모리는 한숨을 돌렸지만 앞길은 험난하다. 상처투성이의 그를 얼굴로 내세워 내년 7월의 참의원 선거를 싸울 수 있다고 보는 의원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번 부결은 그의 체면을 세워주었지만 퇴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주류파는 당 총재선거를 앞당기는 방안을 저울질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새 총재 후보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전 후생상,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전 외상이 유력하다.

후유증도 클 전망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감정적 대립은 전례없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지율 10%대로 내려앉은 모리 체제를 껴안은 자민당류의 정치는 여론의 벽에 부닥칠 전망이다. 가토의 좌절은 자민당 쇠락의 전조인지 모른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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