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서울을 동아시아의 브뤼셀로 키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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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금 우리는 세계사적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구미(歐美) 열강이 중심이 된 주요 7개국(G7) 체제가 신흥국들이 대거 포함된 주요 20개국(G20) 체제로 대체되고 있는 것은 상징적이다. 힘의 중심이 미국에서 아시아로 이동하면서 21세기의 새로운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는 곳 중 하나가 베이징-서울-도쿄를 잇는 ‘베세토(Beseto) 3각축’이다. 인접국인 한·중·일 3국 모두 G20 회원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 나라의 인구를 합하면 15억202만 명이다. 어림잡아 지구촌 인구 5명 중 한 명이 한·중·일 3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2008년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3개국의 GDP 합계는 9조6984억 달러로, 전 세계 GDP의 16.1%를 차지하고 있다. 교역량으로 따져서도 세계의 16%를 3국이 점유하고 있다. 외환보유액 합계는 3조1778억 달러로, 세계 전체(6조7129억 달러)의 거의 절반(47.3%)에 달한다. 한·중·일 3국을 빼놓고 글로벌 경제 이슈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중·일 정상회담이 정례화하는 등 최근 들어 3국간 협력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상설 사무국이 없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지난해 10월 베이징에서 열린 3국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상설 사무국 설치를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짐에 따라 3국 관리 20명 정도로 구성된 상설 사무국이 내년 상반기 중 서울에 설치된다고 한다. 동북아 역사에 획을 긋는 대단히 중요한 합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 통합 논의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적으로 실질적 힘을 갖고 있는 동북아가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동아시아 공동체 추진을 위해서는 중·일의 주도적 역할이 필수적이지만 양국의 역사적 경쟁 관계를 고려할 때 한국이 연결고리로서 중재역을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상설 사무국을 서울에 설치키로 한 것은 합리적 귀결이다. 유럽연합(EU)의 사무국이 있는 브뤼셀과 같은 역할을 서울이 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 제고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한·중·일 3국은 과거사의 앙금을 털어내고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추구해야 한다. 일단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이 필요하다. 환경, 기후변화, 관광, 학생교류, 에너지 협력, 방재 등 초보적인 것에서 자유무역협정(FTA), 금융통화, 외교안보 분야로 점차 협력 폭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EU도 처음에는 석탄철강공동체에서 출발했다. 한국은 통일까지 염두에 둔 장기적 비전을 갖고 3국 협력에 건설적 기여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 모르지만 한·중·일 상설 사무국이 장차 동아시아 공동체 사무국의 모체(母體)가 된다면 서울은 21세기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