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두만강 대탐사] 12.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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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2. 휴전선 천리밖 또 하나의 국경이…

우리에게는 두 개의 국경이 있다.

하나는 철책과 지뢰밭을 연상시키는 살벌한 국경이고 또 하나는 광활한 만주벌판과 굽이치는 압록강, 푸른 두만강에 노젓는 뱃사공으로 기억되는 국경이다.

몇 년 전에 소개된 '새 박사' 윤무부 교수와 이북 부친간의 애달픈 사연을 담은 소설 '쇠찌르레기' 는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를 통해 분단의 아픔과 천륜지정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이 국경은 그 너머의 사람들을 더 이상 상상하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천지로 기억되는 또다른 국경은 어떤가.그것 또한 나에겐 그림이나 소설·영화·드라마·유행가 등에서 그려졌던 모습은 아닐까.

13박 14일의 탐사를 통해 나는 비로소 사람들이 숨쉬며 살아가고 있는 국경을 밟게 되었다.그것은 나에게 국경에 대한 새로운 탐색이자 점묘(點描)였다.탐사의 첫 경유지인 중국 랴오닝(遼寧)성의 선양(瀋陽)에서 나는 분단이 낳은 국경과 조우하게 되었다.

빠듯한 시간을 쪼개 랴오닝성 박물관과 고궁,서점을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10살 전후한 서넛 아이들과 부딪쳤다.

“우리는 북에서 왔시요.같은 동포이니 도와주시라요.”우리는 가이드의 말대로 그냥 지나치려 했다.이때 한 아이가 손을 흔들며 “이 미제의 앞잡이들아!”라고 내질렀다.이것이 국경과의 첫 만남이었다.

본격적인 국경 탐사는 압록강 최하류에서 시작되었다.우리는 신의주를 바라보며 단둥(丹東)압록강 단교(端橋)에 섰다.강은 따사로운 초가을 햇볕을 받아 생선의 비늘처럼 빛나고 있었다.실향 월남인인 강원대 원종관 교수는 “쓸쓸하구만”이라며 나직히 말했다.

1950년 11월 6일 압록강 철교가 끊어지던 날,신의주 사람들은 아비규환 속에 온몸이 화염에 싸인 채 단둥으로 건너왔다.철교 위에 선 순간 그 장면이 당시 그곳에 있었던 한국전쟁 중국지원병 쑨요우지에(孫佑杰)의 글과 함께 떠올랐다.

탐사길을 함께한 조선족 옌볜작가 류연산씨는 “압록강 철교가 끊어지던 날,비로소 조선족들은 조선과 중국에 경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단둥에서 만난 공무원 황윤삼(黃潤三)씨는 40대의 조선족 3세다.그는 어린 시절 여름이면 압록강에 나와 조선족과 한족 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멱을 감으며 놀았다.

중조(中朝)철도 통역원으로 일했던 부친은 60년대 불어닥친 문화혁명 당시에 '조선 특무'로 낙인이 찍혀 구류와 노동개조로 수년간 고생했다.그때 그는 조선족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압록강에서 이북배를 바라보면 괜실히 반가움이 앞선다고 했다.그러나 그에게 이북은 조부모의 고향일 뿐 그가 뿌리내린 단둥이 자신의 고향이다.

1985년부터 매년 단오날을 전후하여 단둥에서는 황소내기 씨름을 비롯한 '단둥조선족민속놀이'를 개최하고 있다.

이날 단둥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선양이나 지안(集安),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이 모여든다.현재 그곳에는 조선 전래 민속이 중국의 개혁·개방의 조류를 타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압록강 상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나는 국경 곳곳에서 새로운 문화와 그것을 생산하고 있는 주인공들을 접할 수 있었다.

조선족들은 쌀과 된장·김치,그리고 조선어를 중국식 '만만디'문화의 그릇에 담아 버무리고 있었다.그들은 조선의 문화에 중국 한족의 문화를 수용하여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백두산이 가까와질수록 압록강은 점점 더 좁아졌다.창바이(長白)현에 백두산 탐사를 위한 베이스캠프를 쳤다.

창바이조선족자치현으로 들어오는 내내 한국 어느 시골을 여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했다.모든 간판에 한글도 병기(倂記)해놓아서일까.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정씨식당(鄭氏酒店)'을 찾아 갔다.여기저기 따가운 가을 햇살을 받아 매운 맛을 더해가고 있는'태양초'로 도배한 듯한 그 집은 우리네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다.우리는 김치와 된장찌개를 곁들인 조선식 식사를 참 맛나게 먹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백두산에 가기 전 창바이의 발해 유적지 영광탑을 들리던 중 70여 기의 조선족 열사들의 비석과 함께 '혁명열사기념탑'도 답사했다.류연산씨나 동북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안화춘씨는 항일 기념비는 조선족 자부심의 상징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들에게 항일 열사 안중근·김약연·홍범도·류인석·량세봉·주덕해 등은 모두가 자랑거리였다.이러한 항일의 역사가 있기에 거대한 한족 속에서도 존중받는 소수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아닐까.

영광탑 언덕 아래로 안개와 함께 압록강이 흐르고 있다.강넘어 지척에 있는 북한 혜산의 '보천보 전승기념탑'에는 항일의 전사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그 언덕에서 1937년 6월,김일성은 부하들을 이끌고 일제 지서를 습격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은 당시 국내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지금은 이러한 사실들이 남과 북,조선족 각각에게 미완의 역사로 남아 있다.앞으로 통일이 되는 날 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다시 쓰여져야 할 것이다.

천지 답사에서 얻은 감격은 그간의 노독을 말끔히 가셔주었다.그 즈음 국경에도 엄습하고 있던 태풍의 영향으로 탐사는 빗속에서 강행되었다.일단 여장을 장백폭포 아래에 있는 '창바이대우호텔'에 풀었다.이른 아침,이 호텔에 근무하는 조선족 5세 여성인 박리화(21)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재 그녀는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게 꿈이다.그에게 중국과 남한이 농구시합을 한다면 어디를 응원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중국'이라고 대답했다.이남과 이북이 시합을 해도 중국이 승리하는데 유리하게 될 팀을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은 중국인 조선족임을 분명히 했다.또 그녀는 이북이건 이남이건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친척이 잘 살아야 자기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아,그렇다.그녀에게 남한이나 북한은 친척의 나라일 뿐이었다.

두만강 투먼(圖們)시에서는 그 '친척의 나라'를 찾아가는 조선족 두 명을 만났다.다리를 건너 북한의 함북 온성군 남양리로 가려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그들의 짐꾸러미에는 북한의 친척들에게 선물할 물건과 장사할 물건,이를테면 텔레비전과 쌀·잡곡·옷가지 등이 잔뜩 들어있었다.사진을 같이 찍자고 청하자 수줍어하면서도 선뜻 응했다.

여행의 후반부는 두만강 탐사로 이어졌다.강을 따라 가는 길 곳곳에 펼쳐진 풍요로운 논을 보면서 '쌀'이야말로 조선족의 또 하나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세들은 조선의 쌀농사기술을 가져가 척박한 허허벌판을 옥답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그후 쌀농사가 널리 퍼졌지만 지금도 황금빛 논들이 출렁거리는 곳에서는 조선족을 만나기가 십상이다.

이번 국경선 탐사에서 나는 비록 보이지 않는 긴장은 있을지라도 국경을 벗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았다.그들은 함경도 말을 기본으로 특유의 말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쌀밥을 먹고 김치와 된장을 먹는다.또한 룽징(龍井)해란강의 일송정에서 만난 조선족 아이들은 항일정신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먼 거리를 에둘러온 국경선에서 나는 또 다른 분단과 부딪쳤지만 자신만의 문화와 정체성을 빚어내고 있는 조선족을 만났다.이제 머리 속 낡은 상상의 국경을 저 멀리 하고 새로운 정신과 문화가 용트림하는 미래의 국경에 나는 서 있다.

김귀옥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

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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