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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읽기] 기보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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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음악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음의 높이와 길이 두 가지 요소를 나타내는 기보법(記譜法)이 필요하다.

이 두 요소가 충족되는 기보법이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세종때다.

서양의 5선과 음표에 해당하는 율명(律名)과 정간(井間)으로 기보하는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세종은 향악을 정비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 '여민락' '치화평' '취풍형' '보태평' '정대업' 등 대대적인 음악 창작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음악을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해 악보가 필요했다.

이전의 기보법은 단지 음높이만을 기록할 뿐 음의 시가(時價)를 나타낼 수 없었다.

그 결과 고안된 정간보는 시가를 나타내는 악보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조선조의 악보는 왕실의 의전(儀典)용 음악을 기록한 관찬(官撰)악보와 문인들이 남긴 민간 악보 등 두 종류가 있다.

관찬악보는 관악기.현악기를 아우르는 총보(總譜)의 성격이 강하고, 민간 악보는 거문고 악보가 주류를 이룬다.

성현(成俔)은 거문고 가락을 기보하는 합자보(合字譜)를 창안했다.

뛰어난 명연주가라 하더라도 사람과 함께 그의 신묘한 음악은 사라지고 말아, 후세사람들이 들어볼 수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박곤.김복근 등과 함께 만들었다.

스승 없이 스스로 연주법을 터득해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성현의 합자보는 이후 문인들이 즐겨 연주하던 거문고 가락을 기록하는 데에 지속적으로 사용돼 풍류음악 변천사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다.

정조대의 학자 서명응(徐命膺)은 조선조 궁정에서 연주되던 음악을, 그의 손자인 서유구는 19세기를 전후하여 문인들이 연주하던 거문고.금.생황.양금 등의 가락을 악보로 남겼다.

이승무(李升懋)는 집에 거문고가 있으나 그것을 배우려 해도 스승이 없어 연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거문고의 실제소리를 묘사한 구음(口音)으로 연주법을 부호로 나타낸 '삼죽금보' (1841)를 편찬했다.

조선조에 국가 혹은 개인이 편찬한 고악보는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5백여년에 걸쳐 만들어져 100여종에 이른다.

서양음악은 작곡가가 남긴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 음악은 가락을 익히고 난 다음 자신이 가락을 덧붙이거나 일부를 변형하여 자연스럽게 변화를 준다.

이전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리듬.박자 등 선율에 적지 않은 변화의 궤적이 바로 고악보에 그대로 담겨져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수백년 전에 작곡가가 남긴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서양음악과 다른 우리 음악의 특징이다.

임미선 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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