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짜리 감기에 15가지 약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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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부 金모(경기도 하남시.24)씨는 최근 4개월 된 아들이 고열증세를 보여 A소아과를 찾았다가 처방전을 받고 깜짝 놀랐다.

사흘치의 감기 처방전에 15가지의 약물이 빼곡이 적혀 있었던 것. 金씨는 의사에게 "어린애에게 약 종류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 고 물었다가 "소량이니 문제될 것 없다" 는 얘기만 들었다.

金씨는 "그러나 약국에서 '성인도 중복 복용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마약성분과 향정신성의약품도 포함돼 있다'고 해 아예 조제를 포기했다" 고 말했다.

처방전에는 식의약품안전청이 14세 미만에는 판매를 금지하고 치료 목적인 경우에도 2백㎎ 이하를 이틀까지만 사용하도록 규제하고 있는 향정신성의약품 페놀바르비탈이 사흘치나 들어 있었다.

또한 한외마약(限外麻藥)으로 분류돼 향정신성의약품과 중복 처방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는 코데원정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처방전을 낸 의사는 "약물 종류가 많더라도 소량이라 문제될 것이 없다" 며 "마약도 치료목적으로 흔히 쓰이는 것" 이라고 밝혔다.

주부 朴모(31.서울 강남구 대치동)씨도 감기에 걸린 14개월짜리 아들을 데리고 지난달 말 서울 강동구 B내과를 찾았다가 약물이 13종이나 되는 처방전을 받았다.

朴씨는 "약을 아기한테 먹일 때마다 두려웠다" 고 말했다.

서울 C소아과는 신생아에게는 처방이 금지된 노발긴(해열진통제)과 셉트린(항생제)을 생후 10개월짜리에게 중복 처방했다.

두 약품은 골수 형성이 미숙한 신생아에게 골수장애 유발 우려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C소아과, B내과는 하루 환자가 3백~4백명이나 찾는 이름난 의원이다. 주변 의원은 하루 50~1백명 안팎에 그친다.

일부 소아과 의원들 사이에 '용하다' 는 평판을 얻기 위한 과잉 처방전 발행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간단한 질병에도 순간적인 치료효과가 좋은 마약 성분을 비롯해 약물이 10종 이상이나 포함된 처방을 발행하고 있는 것. 환자가 복합증세를 보일 경우 주력 질환에 대한 치료에 치중해야 하나 확실한 효과를 위해 증상마다 약을 쓰다 보니 과잉처방 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 사실은 본사 취재팀이 서울과 수도권 등의 소아과 의원 10여곳의 처방전을 입수, 분석한 결과 나타났다.

이에 대해 한 약사는 "약 오.남용을 방지한다는 의약분업의 목적에 어긋나며 유아들의 약물 중독.뇌손상 위험이 있다" 고 주장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한 의사는 "약물을 10가지 이상 사용하는 것은 무리한 처방이며 간 손상과 약물 상호작용에 의한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대한소아과학회 관계자는 "통상적인 처방전보다 약 종류는 다소 많다" 면서 "당시 환자의 상태에 따른 적절한 처방이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식의약청 의약품안전국 이희성 과장은 "외국의 경우 감기 환자에게는 보통 3~4가지 약물만 처방한다" 며 "처방은 의사 고유권한이라 과잉처방에 대한 규제 수단은 없다" 고 밝혔다.

인의협 관계자는 "지역 의사회에서 자체적으로 규제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 이라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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