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20년 전부터 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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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현대건설은 더 이상 '현대' 가 아닌 '구식' 이다.

전문가들은 "현대건설의 위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움텄다" 고 입을 모은다. 주택 경기가 나빠지고 대외 신뢰도마저 급락하면서 곪은 상처가 터진 것으로 진단했다.

◇ 20년 전부터 꼬여〓 "90년대 초 이라크.사우디아라비아 공사대금 10억달러가 물린 것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습니다. "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L씨의 말이다.

당시론 엄청난 금액이어서 회사가 흔들거릴 정도였는데, 위기를 모면한 것은 '아랫돌을 빼 윗돌을 궤는' 임시변통 덕분이었다. 이 부문의 대손충당금은 아직도 회계장부에 주름살을 만들고 있다.

고위 임원 출신인 L씨는 "물량 위주, 실적 채우기 식의 무리한 해외건설 확장이 경영난의 씨앗이 됐다" 고 지적했다.

수주 경쟁이 치열했던 80년대 중반 적자 공사를 감수하는 대신 과감히 철수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인도 등이 값싼 인건비를 무기로 한국 업체의 주요 시장을 공략해 수주 단가가 떨어졌고, 미국 벡텔사 등이 장악한 고부가가치 분야는 기술력 부족으로 엄두를 못내는 '샌드위치 상황' 이었다.

◇ 덩치 경쟁 못벗어〓늘어난 조직과 인력을 유지하자니 밑져도 공사를 계속하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현대는 90년대 들어 매해 관급공사를 2조원 이상 수주했다.

그러나 98년 8월 이후 건설업계의 담합구조가 깨지고 공사물량도 줄어 지난해 수주는 7천8백억원에 그쳤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이상호 박사는 "그나마 여력이 있었던 80년대 후반부터 현대는 선진 건설사처럼 종합관리 회사로 변신했어야 옳았다" 며 "건설 환경은 빠르게 변하는데 좁은 나라에서 만년 1등 자리에만 안주했다" 고 진단했다.

공사를 따내면 시공.설계.관리 등 전문 분야별로 나눈 회사에 맡기거나 외부에 용역을 줌으로써 해결하는 선진국형 건설관리(CM)회사로 진작 바뀌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 아파트에 너무 집착〓현대가 아파트 등 민간 수주 공사에 더 비중을 둔 것은 90년대 초부터다. 92년 당시 국민당 총재였던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직후 관급.해외 공사 수주가 잘 안됐다.

이에 비해 주택시장은 신도시 2백만호 건설 로 호황이었다. 현대 관계자는 "이때부터 토목공사 비중을 줄이고 아파트로 눈을 돌린 게 화근" 이라고 말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현대건설의 공공 공사 비중은 40%를 웃돌았는데 92년에 23%, 93년에는 20%로 미끄러졌다. 98년 관급공사의 담합구조가 깨지면서 아예 아파트 공사로 사업 방향을 틀었다.

현대가 지난해 아파트 분양으로 번 돈은 3천6백98억원으로 98년보다 1천2백30억원 늘었다. 그러나 아파트 공사는 선(先)투자 사업으로 분양이 제대로 안되면 막대한 자금이 물린다. 이처럼 아파트 사업에 묶인 돈이 1조4천억원에 이른다.

◇ 정도 벗어난 경영에 모기업으로서 불이익도 커〓92년 대선에서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낙선한 뒤 그에게 붙은 YS정권의 '괘씸 죄' 가 현대건설에 적잖은 어려움을 주었다고 임직원들은 한결같이 지적했다.

주요 관급공사 입찰에서 배제됨은 물론 해외공사는 은행들이 보증을 서주지 않았다. 이때문에 93년에는 성사 단계였던 3건, 2억달러 어치의 수주가 수포로 돌아갔다. 이내흔 전 사장의 92년 총선 출마도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룹 차원에서 추진한 대북사업도 아직 이익이 안나는데 투자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다.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대북사업을 주관하는 현대아산의 사장을 겸임해 금강산 개발사업에 쏟아부은 돈이 6천억원으로 추산된다. 이 사업은 현재 2천4백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다.

모기업이자 지주회사란 점 때문에 계열사 유상증자에 빠짐없이 참여한 것도 부실을 떠안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현대건설이 보유한 관계사 주식은 대부분 발행가를 밑돌아 최근 유동성 위기 이후 급히 처분한 주식의 평가손이 2천억여원에 이른다.

◇ 리더십.신뢰성도 문제〓이런 가운데 올 3월부터 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싸고 빚어진 2세 회장간 갈등은 경영난을 부채질했다. 회사 직원들조차 "김윤규 사장과 김재수 부사장이 갈등의 한 가운데 있어 회사 경영을 등한시했다" 고 지적했다.

LG경제연구원 김성식 연구위원은 "재무제표를 보면 현대건설의 영업력은 여전히 괜찮아 보이지만, 부채의 만기 연장을 안 해주는데 버틸 기업이 국내에 몇 곳이나 되겠느냐" 고 반문했다. 그는 "경영권 다툼에 회사 실상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채권단의 신용을 잃은 게 화를 자초했다" 고 덧붙였다.

◇ 외환위기 맞고도 구조조정 게을리해〓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삼성물산 건설.주택부문은 임직원을 1천20명, LG건설은 3백60명 줄였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인원.조직을 줄이지 못했다.

홍승일.황성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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