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추적] ‘엽기 수련원’ 진실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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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6일 언론을 통해 알려진 광주광역시의 H수련회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회원 71명이 원장 이모(55·여)씨에게 2007년 12월 청산가리를 넣은 커피를 건네고, 계단에서 밀어 넘어뜨리는 등 23차례에 걸쳐 살해를 기도했다. 남녀 회원들이 2008년 2월부터 125차례 수련원에서 향정신성의약품을 음료수에 섞어 마신 뒤 약에 취한 회원을 성폭행하거나 회원들끼리 성관계를 가지게 했다. 피해자였던 회원들도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가지면서 주동자들의 범죄에 가담했다. 2007년 6월부터 83차례에 걸쳐 수련원 헌금함에서 18억5000만원을 훔쳐 원장 살해 조직 활동비로 사용했다.”

지난해 7월 수련원 측의 고소로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관련자들은 자진 출석해 범행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일반적인 사건과는 딴판이었다.

광주북부경찰서는 71명 전원을 살인미수·협박·절도 등의 혐의로 불구속 송치했다. 검찰이 사건을 넘겨 받아 수사하는 사이에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잇따랐다. 경찰관인 회원이 여성 회원을 성폭행했다는 고소장이 제출됐고, 해당 경찰관이 사표를 내기도 했다. TV방송의 추적 프로그램이 방영한 수련원의 모습과 회원들의 고백은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한 부부 회원은 “대학생 아들과 여고생 딸과도 성관계를 했다”고 말했다.

◆거짓으로 꾸민 시나리오=엽기적인 범행은 수사 7개월 만에 자작극으로 드러났다. 검찰과 경찰이 수사력을 허비한 결과가 됐다.

김철 광주지검 강력부장은 1일 “수련원생 71명을 조사했으나 자백 내용이 비상식적이고 객관적 증거에도 어긋나 모두 무혐의 처분했다”고 밝혔다. 위계(僞計)에 의한 공무집행방해나 무고 혐의를 적용하는 것을 검토했지만, 범죄 구성 요건이 맞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먼저 회원 12명이 원장과 그 가족을 살해하려 했다고 자백했으나 원장 등이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범행에 사용했다는 청산가리나 양잿물은 자수 직전에 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무엇보다 범행을 주동했다는 회원이 모두 원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이었다.

피의자들이 마약을 복용했다며 스스로 제출한 증거물은 수면유도제·신경안정제로 밝혀졌다. 회원들이 제출한 ‘9명 성관계 동영상’ 장면조차 허위 자백 주동자들이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던 지난해 10월 초 연출해 촬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련원 헌금을 빼돌려 원장 살해 활동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문제의 은행계좌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왜 자작극 벌였나=회원들이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떠받들고 있는 원장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한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이씨가 사기죄로 재판을 받으며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자신들의 음해로 이씨가 누명을 쓴 것처럼 꾸몄다는 설명이다.

김 부장검사는 “회원들 가운데는 탤런트·의사·교사·공무원 등 ‘잘나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지 마음이 닫혀 있었다”고 말했다.

원장 이씨는 ‘불치병을 치료해 주겠다’며 돈을 받은 혐의(사기 등)로 기소돼 1, 2심에서 징역형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 한 회원이 경쟁 수련원 대표를 살해하려 한 사건이 벌어졌다. 검찰은 살인미수 사건과 관련해 회원 4명을 지난달 18일 위증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들은 지난해 7월과 12월 살인미수 피의자이자 동료 원생(48)의 증인으로 출석, “원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난해 5월 광주의 한 곰탕집에서 10여 명이 살인미수 자작극을 꾸몄고, 피해자 역을 맡기로 한 D씨(43)에게 대가로 5000만원을 건넸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통화 내역 등을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자신들과 노선을 달리 해 새로운 조직을 꾸린 D씨를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H수련회는 1999년 ‘자기 본성을 찾아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한다’며 결성됐다. 광주 4곳과 순천·부산·서울 1곳씩 7곳의 수련원에서 모두 30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광주=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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