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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현대, 건설 자구안 못내는 속사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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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현대그룹이 흔들리고 있다. 오너인 정몽헌(鄭夢憲)현대아산 회장이 앉힌 사장들이 현대건설 지원방안을 반대했다.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해당 계열사와 상의 없이 자구방안을 발표해 혼선을 빚으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현대 특유의 응집력을 활용해 계열사의 지원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던 鄭회장의 계획은 반발에 부닥쳐 자구방안을 확정하지 못하는 등 우왕좌왕하고 있다.

현대를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아무리 재벌의 지배구조가 변했어도 사장이 회장의 결정에 반발하기는 어려운 일" 이라며 "실현 가능성이 작은 방안을 왜 미리 발표했는지 궁금하다" 고 말했다.

오너 회장 형제간 다툼 때 정몽구(鄭夢九)현대차 회장측을 한 목소리로 비난했던 정몽헌 회장측 가신과 사장단이 이제는 현대건설 해법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다.

재계는 정몽헌 회장 그룹이 구주류(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와 신주류(김충식.박종섭 사장)로 갈라섰고, 현대건설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든 내부 앙금이 남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재수 본부장은 사태를 해결한 뒤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이미 표명했다.

◇ 알력 빚는 가신들〓정몽헌 회장과 김재수 본부장은 현대상선이 보유한 현대중공업.현대전자 주식 5천4백억원어치를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하려 들었다.

그러나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이 펄쩍 뛰었다. 1978년 현대중공업에서 현대상선으로 옮긴 뒤 20여년 동안 정몽헌 회장과 같이 움직였고, 鄭회장의 배려로 사장까지 오른 그로선 '어려운 일' 을 한 것이다.

金사장의 반발에 대해 일단 현대그룹의 가신 구도가 변했기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재계는 정몽헌 회장의 '가신 3인방' 으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김윤규씨-김재수씨를 꼽아왔다. 형제 회장간 갈등 당시만 해도 이들의 역할은 컸고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난 7~8월부터 김재수 본부장은 이익치씨가 현대증권 회장에서 사퇴하지 않아 그룹을 사지(死地)로 몰고간다고 지적했고, 결국 이익치씨는 물러났다.

이익치씨와 김충식 사장이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익치씨는 또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놓고 김윤규 사장과도 알력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충식 사장 등 계열사 사장들은 김윤규.김재수씨가 올들어 네차례나 현대건설 자구방안을 내놓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대전자 박종섭 사장도 현대건설 지원방안을 마련해보라는 정몽헌 회장의 지시를 거부했다. 朴사장은 정주영(鄭周永)전 명예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지낸 1979년 통역을 맡았다가 스카우트된 인물이다.

◇ 경영환경이 바뀌었다〓계열사의 현대건설 지원 거부를 재벌 경영환경의 변화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충식 사장은 "현대전자.현대중공업의 주가가 크게 하락한 마당에 두 회사의 주식을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한다면 주주들이 가만히 있겠느냐" 고 말했다.

현대상선의 사외이사는 "아직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았지만 주식을 팔아 현대건설을 지원하겠다면 이사회를 통과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현대전자도 외국인 투자자.소액주주.시민단체의 반발을 이유로 현대건설에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현대전자 사외이사인 우창록 변호사는 "현대건설을 지원해 현대전자가 동반 부실해질 우려가 있다면 어느 사외이사가 동의하겠느냐" 고 반문했다.

고려대 조명현(경영학)교수는 "계열사의 주주가 따로 있는데 현대건설을 지원할 경우 소액주주나 시민단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이라면서 "현대건설을 살리려면 명예회장 가족들이 개인 돈으로 지원해야 한다" 고 말했다

◇ 정몽헌 회장의 생각〓잦은 장기 해외출장으로 정몽헌 회장이 현대건설 사태의 본질을 잘 모른다는 지적도 나왔다.

계열사의 현대건설 지원방안에 장애가 많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검토 수준에서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이 오히려 그룹을 지키기 위해 '한 단계 높은 생각' 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대상선과 현대전자의 현대건설 지원 거부는 결국 정몽헌 회장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법 테두리 안에서 계열사가 현대건설을 지원하라는 정부의 요청에 대해 '계열사의 반발로 어쩔 수 없으며,가능한 자구방안은 결국 서산농장 매각과 오너 지분 매각밖에 없다' 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현대상선과 현대전자의 지원 거부를 통해 만약 현대건설이 잘못되더라도 두 회사는 살리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몽헌 회장이 현대건설 지분을 제외한 나머지 보유 주식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가 번복.재검토한다고 한 것은 현대상선과 현대전자의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고 말했다. 현대가 현대전자를 독립 경영하겠다는 구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시래.김동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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