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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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10면

사람들은 누군가를 부를 때 ‘사장님’이라고 한다. 정말 그들의 직업이 모두 경영자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특별히 경영을 숭상하는 민족도 아닐 텐데. 어디로 보나 경영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긴 나도 사장님이란 소리를 듣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속이 거북하다. 가령 식당에서 음식값을 치를 때나 어쩌다 택시라도 타게 되면 어김없이 나는 사장님이 되고 만다. 부르는 쪽에서는 호의를 갖고 사용하는 호칭이겠지만 고지식한 나는 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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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장님 아닙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 사장님은 김혜정이란 분이고 저는 그냥 직원입니다.”
김춘수의 ‘꽃’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렇다고 내가 꽃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장님이 되고 싶지는 않다. 될 수도 없다. 내게는 그럴 만한 자질이나 역량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은 무엇일까?

집에서는 ‘아빠’나 ‘당신’ 또는 ‘김씨’로 불린다. 회사에서는 ‘김 부장’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다. 가끔 출판 쪽 사람들을 만나면 ‘선생님’으로 호명된다. 그러나 정말 내가 듣고 싶은,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던 호칭은 부끄럽지만, 부끄러워서 귀가 다 빨개지지만 고백하자면 ‘오빠’다.

나는 여동생이 없었고, 여자 후배도 없었다. 더러 여자 후배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시절이 고약했던 탓이다. 아내와 연애할 때도 ‘오빠’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내는 나와 동갑이기 때문이다.
오빠라는 호칭은 ‘내 귀에 캔디’처럼 달콤하다. 아무리 달콤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들을 수 없다. 역시 호칭은 부르는 사람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많이 듣는 호칭은 당연하지만 ‘아저씨’다.

어제 나는 밤 10시가 넘어 늦은 저녁을 허겁지겁 먹었다. 배도 꺼지게 할 겸 설거지를 하고 꽉 찬 음식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갈 때 날씨가 추워서 패딩 조끼를 입고 목도리를 둘렀다. 그러니까 내 옷차림은 추리닝 바지에 패딩 조끼를 입고 목도리를 둘둘 두른 데다 빨간 고무장갑을 낀 그런 다소 전위적인 것이었다. 참, 거기다 파란 음식쓰레기통도 들고.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파란색 플라스틱통의 뚜껑을 잘 닫았다. 그래도 음식찌꺼기 냄새가 나서 한참 밖에 서 있다가 아파트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으슬으슬 추워서 나는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서 있었다. 아저씨는 ‘술 푸게 하는 세상’의 술꾼처럼 술을 거나하게 드신 듯 가볍게 그리고 보기 좋게 몸을 휘청휘청 흔들었다. 나는 음식물 냄새 때문에 민망해서 음식쓰레기통을 뒤로 숨겼다.

그때 아저씨가 상체만 뒤로 물러나면서 나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속 술꾼의 눈빛으로. 평소 인사 강박이 있는 나는 아저씨에게 가볍게 목례로 인사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그윽한 눈빛을 문득 째려보는 눈빛으로 바꾸면서 이렇게 나를 부른다.

“아저씨! … 아저씨!” “네.”
“아니, 계단 청소를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떡해!”
이렇게 ‘아저씨’라고 불렸으니 이제 나는 그에게로 가 그의 아저씨가 되어야겠다. 내일은 정말 계단 청소라도 해야겠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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