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인권외교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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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벨 평화상 수상 축하전화를 받은 그날, 정부는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연내 방한(訪韓)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 제동걸린 달라이 라마 訪韓

달라이 라마는 1989년, 만델라는 93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다. 金대통령에겐 노벨상 선배들인 셈이다. 그 두 지도자를 대하는 그림이 너무나 대조적인 데서 혼란이 온다.

전화통화에서 만델라는 "마땅히 상을 받을 분이 받았다" 면서 오랜 투옥을 극복한 불굴의 의지 등을 치하했고, 金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인권과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고 화답했다.

만델라의 방한 의사에 金대통령이 반색함으로써 그는 내년 3월 서울에 오게 됐다. 두 인권지도자의 품격높은 만남이 정말 기대된다.

그러한 따뜻한 교감이 달라이 라마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정부는 내년에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꼭 성사된다는 보장은 없다.

설령 달라이 라마가 서울에 온다 하더라도 이번에 드러난 한.중(韓中)간 분위기로 미뤄볼 때 金대통령과의 따뜻하고 격조있는 만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金대통령으로선 노벨상 선배이자 세계가 추앙하는 정신적 지도자에 대해 큰 결례를 했으니 개인적으로도 안타까울 것이다.

국민들의 섭섭함도 크다. 달라이 라마가 지니고 있는 국제정치적 민감성과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어려움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그걸 소화해내지 못하는 우리 국력의 크기와 외교역량 때문에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든다.

노벨상 수상자 두사람을 대하는 이중적 모습은 인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반성하게 한다.

당장 동티모르사태 때의 적극적이었던 '인권 파병' 이 떠오른다. 그때는 국가적 이익과는 상관없이 오직 동티모르 주민들의 인권보호라는 명분 하나로 젊은 병사들을 어느 구석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낯선 땅으로 파병했다.

파병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제적 비난이 뒤따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당 단독표결이라는 무리수까지 동원됐다.

이번 달라이 라마 방한문제엔 세계 인권단체의 이목이 집중됐다. 국가적 체면이란 측면에선 동티모르사태 때보다 큰 사안일 수 있다.

59년 망명 이래 일본을 포함, 전세계 50여개국을 방문하면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그가 한국 정부에 의해 제지됐으니 선뜻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도 金대통령이 표현한 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권국가' 에서 그랬으니 더욱 그렇다.

동티모르 인권과 티베트 인권은 무엇이 다르기에 달리 대접해야 하는지. 중국의 침탈로 나라를 잃은 지 50년 동안 티베트인들이 겪은 고초와 독립의지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같은 인권외교의 두 얼굴은 국가 이미지 실추로 이어질 게 뻔하다.

지난해 11월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 회의' 에 참석한 金대통령은 미얀마의 탄 슈웨 총리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金대통령은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 및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를 언급했다고 전해졌다. 인권 지도자에 걸맞은 인권외교임에 틀림없다.

*** 北동포 인권에도 관심을

노벨위원회의 金대통령 선정 발표문에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압제에 반대한 그의 노력도 괄목할만한 것" 이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노벨상 심사가 끝나자 마자 인권홀대가 선보였으니 지금까지의 인권노력을 두고 뒷말이 나올 법하다.

사실 티베트 주민의 인권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민족 내부에 있다. 남의 나라 인권에 대해 운위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우리 핏줄, 우리 형제들의 인권문제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모른체해왔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 방북 때 동원된 10만명의 일사불란한 매스게임은 북한 인권상황을 상징적으로 설명해 줬다.

지도층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품. 그게 북한 주민들의 삶의 단면이다. 통일보다 더 급한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회복시켜주는 일이다.

노벨상으로 한층 성숙된 우리 사회의 인권역량은 당연히 가장 먼저 북한쪽으로 모아져야 한다. 최소한 동티모르.미얀마 등에 적용했던 인권기준으로 북쪽을 향해 인권회복을 촉구해야 한다.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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