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속도조절" 왜 요청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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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이 26일 북한의 '남북관계 속도조절 요청' 사실을 첫 공개함에 따라 향후 남북관계 일정의 전면 재조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북측은 북.미, 북.일 수교 움직임에 따른 인력부족을 들어 "한두 달은 속도를 줄이고 내년 봄부터 급피치를 올리겠다" (전금진 내각책임 참사)고 말했다는 게 朴장관의 설명.

최근 북.미관계 급진전 속에 남북간의 일정이 잇따라 지연되고 있는 데 대한 우려를 의식한 설명이었다. 이관세(李寬世)통일부 대변인은 그러나 "남북간의 합의내용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고 밝혔다.

◇ 감속(減速)요청한 북한 속사정=朴장관은 "북한 대남 일꾼들이 최근 여러 가지 명함을 들고 다닌다" 고 했다. 베이징(北京)의 외교 일꾼이 적십자회담에 겹치기 출연하는 식이라는 얘기다.

북한은 다음주 북.미 미사일 전문가회담과 북.일 수교 협상(베이징)에 이어 11월에는 빌 클린턴 방북이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있다.

朴장관은 "최근 평양 상황을 볼 때 이해가 되는 부분" 이라며 "특?북한이 북.미 관계를 상당히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 사안을 좀 미루려는 것 같다" 고 진단했다.

朴장관은 또 "고려호텔의 1개 동(棟)을 모두 비전향 장기수들이 쓰고 있어 시설 자체도 여유가 없는 것 같다" 고 덧붙였다.

주민통제를 위한 시간확보 측면도 거론됐다. 朴장관은 "남한의 '김정일 쇼크' 보다 북한의 '김대중 쇼크' 가 더 큰 상황" 이라며 "혼돈에 빠진 북한 주민에 대한 사상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고 전했다.

◇ 11월말까지 남북관계 잠시 휴식=따라서 11월 28일의 4차 장관급회담(평양)에 가서야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 현안 해결과 일정 재조정이 가능할 전망이다.

다음달 2일의 이산가족 상봉은 자연스레 12월로 넘어가게 됐고, 경협 실무접촉과 북한 경제시찰단 방문, 국방장관급 회담 등 행사도 1~2개월 순연이 불가피하게 됐다.

특히 '내년 봄부터 속도를 높이자' 는 북측 제안은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 시점과 맞물려 있다.

일단 미.일과의 관계를 정리한 뒤 金위원장 답방에 맞춰 다시 교류협력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북측의 '속도조절' 의도를 둘러싼 논박도 사그러들지 않을 조짐이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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