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소통] '나인 야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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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기호(sign)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소통은 늘 거짓말의 가능성을 지닌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란 "거짓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 이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

거짓말은 많은 경우 메를로 퐁티가 인간의 비극적 모습의 근원이라고 본 '의도와 결과 사이의 괴리' 를 초래한다.

서로의 거짓말을 다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슬픈 코미디가 되고 말 것이다.

영화 '나인 야드' 는 얽히고 설킨 위선으로 이루어진 슬픈 코미디다.

한참 따라 웃다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희화화한 것 같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왠지 마음이 허전해지기까지 한다.

'나인 야드' 의 등장인물들은 나름대로 양다리(경우에 따라서는 세다리)걸치기 작전을 구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파악한다.

물론 그 목적은 돈이다.그들은 돈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만 솔직할 뿐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위선적이다.

치과의사 오즈(매튜 페리)의 아내 소피는 남편을 죽여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청부업자를 찾아다닌다.

오즈는 살인청부업자인 지미(브루스 윌리스)의 거처를 마피아 두목 야니에게 알려 현상금을 타려는 척하면서 오히려 야니를 속이고 지미 몰래 그의 아내 신시아(나타샤 헨스트리지)와 성관계를 가진 뒤 그게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한다.

야니의 부하 프랭키는 사실 지미와 한통속이어서 야니를 배반하고, 오즈의 간호사 질 역시 오즈를 죽이기 위해 소피에게 고용된 청부살인업자였고…. 이런 식으로 거짓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된다.

하버마스는 소통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하나는 전략적 행위인데 이는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계산된 행위다.

또 다른 하나는 소통적 행위로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공동체적 행위를 말한다.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소통은 상대방을 속임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소통적 행위는 서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상호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지향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진정한 연인간의 사랑의 속삭임이다.

여기에는 위선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기든스 역시 '정서의 민주주의' 라는 개념을 주장하면서 연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민주 사회의 이상적 소통의 형태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들마저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이에 대해 '나인 야드' 는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다.

상대방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가 (여기서는 돈)있기 때문이다.오직 인간 관계 그 자체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신시아와 오즈처럼)그들은 위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주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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