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로비자금 추적 전문가가 본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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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21일 기업이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선거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한 현행 법규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헌법에서 보장된 언론자유를 침해한 조항이라는 이유다. 미국 기업들로서는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특정 후보 지지 또는 비난 광고를 얼마든지 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렇게 되자 미 정치인들이 기업들의 로비에 놀아날 위험이 커졌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천문학적인 지지 또는 비난 광고를 미끼로 압력을 넣으려는 기업들이 늘어날 게 불문가지인 까닭이다. 오바마 대통령부터 “특수 이익집단의 돈이 정치권에 쏟아져 들어오는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미 정가의 격변을 앞두고 현지 전문가를 만나 향후 전망을 들었다.

실라 크럼홀츠 책임정치센터(CRP, Center for Responsive Politics) 사무총장은 17년째 미국의 로비자금 흐름을 추적해 온 정치자금 전문가다. 투명한 정치자금을 위해 탄생한 시민단체인 CRP에 대학 졸업 직후였던 1993년 참여했다.

로비업체가 몰려 있는 워싱턴 K스트리트의 CRP 사무실에서 최근 크럼홀츠 소장을 만났다.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로비자금 규제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로비산업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며 “극심한 경기침체를 고려하면 오히려 성장한 셈”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미 책임정치센터(CRP) 실라 크럼홀츠 사무총장.

- 지난해 미국 로비업계는 어땠나.

“지난 10년간 로비산업은 급성장했다. 1999년 14억 달러(약 1조6000억원) 수준이던 로비 규모는 2008년 33억 달러(약 3조7000억원)로 커졌다. 지난해는 33억 달러를 웃돌 것으로 추산된다. 최종 통계는 1월 말 발표된다. 이렇게 큰돈이 동원되니 워싱턴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됐다.”

- 어느 업종에서 로비가 심했나.

“법안 로비는 오랫동안 약자로 부르는 FIRE(Finance·금융, Insurance·보험, Real Estate·부동산) 로비가 심했다. 하지만 2006년부터 건강보험 로비가 가장 뜨겁다. 예컨대 청량음료 업계는 건강보험과 관계 없었다. 하지만 법안 초안에 음료업계에 특별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나타나자 로비전에 뛰어들어 수백만 달러를 뿌렸다. 의료장비 업체의 경우도 비슷하다. 의료업계는 2000년 대선 때 5600만 달러(약 630억원)의 정치 후원금을 썼는데, 2008년엔 1억2700만 달러(약 1400억원)로 늘었다. 건강보험 로비는 86년 레이건 정부의 세제개편 때 이후 최대 로비활동이다. 거의 모든 업종에서 뛰어들었다. 또 올해는 에너지 관련 로비산업이 급성장했다.”

- 로비산업이 왜 계속 성장하나.

“안타깝게도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의회는 국민이 정부에 대해 불만과 요구를 제기하는 권리를 막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만약 의회가 탱크에 관한 법을 통과시킨다면 보잉이나 록히드사는 그 법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낼 수 있다. 물론 개인이나 시민단체도 같은 권리가 있다. 문제는 돈이 더 전문성 있는 정보를 만들어 낸다는 거다.”

-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직후 정부와 의회, 거대기업의 유착을 끊기 위해 ‘회전문 인사’를 규제하지 않았나.

“많은 사람이 당시 ‘K스트리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가 경기부양, 건강보험 개혁 등의 개혁법안을 무더기로 추진하자 이익단체들은 로비자금을 대량으로 쏟아 부어 로비업계가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 등록된 로비스트의 로비활동은 별다른 영향력이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등록된 로비스트가 특별히 중요하다. 로비를 하려면 전문성·인맥·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전직 의원처럼 인맥 있는 로비스트는 인맥을 파는 것이다.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가 대부분 등록 로비스트고, 1만3000~1만4000명이다. 미등록 로비스트는 5만 명 정도로 본다. ”

- 올해 전망은 어떤가.

“지난 수십 년의 관행과 헌법이 로비제도를 보장하는 한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올해는 중간선거가 있는 만큼 로비스트들이 법안에 쏟는 로비자금을 줄이고 의원들의 선거 캠페인에 자금을 집중해 재선에 도움을 주려 할 것이다.”

워싱턴=최상연 특파원

☞◆미 책임정치센터(CRP)=1983년 두 전직 상원의원(프랭크 처지, 휴 스콧)에 의해 설립됐다. 처음엔 의회 자료를 넘겨 받아 단순히 기업·단체별 정치 기부금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며 정치자금을 추적했다. 이후 노하우가 쌓이면서 과거엔 놓쳤던 돈의 흐름과 입법과의 상관관계까지 잡아내고 있다. 가령 제약업체가 특정 의원에게 선거자금을 기부하면 그 의원이 의료계와 관련된 법안을 제안했는지, 유사 법안 표결에 어떻게 투표했는지를 추적해 공개하는 식이다. 실라 크럼홀츠 사무총장은 “200달러(약 23만원) 이상 기부자의 자금 흐름을 모두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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