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공은 놓았지만 농구 위한 펜은 놓지 않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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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16면

방열 교수(가운데)는 1997년 동아시아대회에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했다. 코치는 유재학(왼쪽)이었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 시절을 추억하는 이들은 이 사람을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 트리오’를 앞세워 최강 자리를 지켰던 기아자동차의 사령탑 방열(69) 전 감독이다.

‘스포츠 기록문화’ 황무지 개척하는 백발의 승부사 방열

최근 농구계 일선에서 소식이 뜸한 방 전 감독의 근황을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다. 그가 현재 코트에 서 있지 않다고 해서 농구를 떠난 것은 아니다. 그는 200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경원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교편을 잡았고, 현재 ㈜농구아카데미 대표와 프로농구 모비스의 기술 고문을 맡고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팀 감독 시절의 방열 교수.

그리고 또 한 가지, 방 대표는 지금까지도 쉴 새 없이 농구 관련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96년 이후 농구 관련 서적 6권을 냈다. 그는 “2007년에 『농구바이블』이라는 책을 낼 때는 주변에서 미쳤다고들 했다. 강의하고 농구 보느라 시간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들었지만 4년을 준비한 끝에 책을 냈다”고 말했다.

윤기 흐르는 백발과 매끈한 패션 감각까지 방 대표는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69세의 나이에도 농구에 대한 열정이 조금도 식지 않았다는 게 그 비결일 것이다.

방열 교수의 ‘전략농구’는 그의 여섯 번째 농구이론서다. 이번 책에서는 현장에서의 경험을 적극 반영해 실제 경기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최정동 기자

방 대표는 최근 옛 제자들과 뭉쳐서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이번에는 딱딱한 농구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 코트 위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실전 전략에 관한 것이다. 유재학 모비스 감독, 이문규 전 여자농구대표팀 감독이 방 대표와 함께 그들이 직접 겪었던 실전 전술 노하우를 풀어놓았다. 노스승과 제자들의 합동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깊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할까요?
20일 만난 방 대표는 지난주까지 『전략 농구』를 탈고하고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번 책은 큰 그림을 그리는 ‘전술’이 아니라 경기에서 상황별로 대처하는 ‘전략’을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Q. 당신이 A팀의 감독이다. B팀과 경기 중이다. 경기 종료 1초 전, A팀은 B팀에 1점 뒤지고 있다. 공격권은 B팀이 갖고 있다. 이때 작전타임을 부른다면 과연 어떤 작전을 지시할 것인가?

갑자기 주어진 주관식 문제는 까다로웠다. 게다가 한국 농구 전술·전략의 대가로 불리는 방 대표 앞에서 ‘들이대며’ 대답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패스를 차단해서 스틸을 노리면 어떠냐”고 하자 “그건 현실적으로 매우 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저었다. 대충 “파울 작전은 어떨까”라고 수학시험 주관식 문제를 찍는 심정으로 답했다. 방 대표는 또 고개를 저었다. “단 1초가 남았는데, 파울을 해 봐야 자유투 2개 주고 나면 1초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을 해서 경기를 뒤집기는 어렵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방 대표가 말하는 답은 이런 내용이었다.

A. 작전타임 후 B팀은 사이드라인에서 공을 집어 넣으며 공격을 시작한다. 이때 코트 안에서 공을 받는 선수는 뛰어다니면서 수비수에게 속임 동작을 하며 공을 받으려 한다. 이때 수비자가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 내야 한다. 파울을 얻으면 1초 동안 여유 있게 자유투를 넣어 역전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방법으로 경기를 뒤집은 사례가 수차례 있다.

방 대표에게 “오펜스 파울을 유도해 내는 것도 기술인데, 그럴 만한 선수가 많지 않은 것 아니냐”고 ‘항의’도 해 봤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선수의 능력을 파악하고 끌어올리는 건 이미 훈련 때 감독이 다 해 놓아야 할 일이다. 선수에게 작전 지시를 했는데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서 이기지 못했다는 건 변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감독들 중에서 누가 전략적인 측면에서 센스 있고 능력이 있는지 조금 더 잘 보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2009~2010 프로농구의 재미있는 전략
방 대표에게 이번 시즌 프로농구에서 나왔던 흥미로운 전략이 어떤 게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모비스의 전략을 소개했다. 이번 시즌 프로농구에서는 골대 밑의 페인트존(선수가 3초 이상 머물 수 없는 구간) 모양이 바뀌었다. 종전에는 골밑 엔드라인 쪽이 더 넓은 사다리꼴이었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직사각형이 됐다. 방 대표는 “골밑 페인트존의 너비가 짧아졌다. 과거에는 골밑을 가로질러 가면서 도움 수비를 하도록 시키지 못했는데, 모비스는 이번 시즌 가장 먼저 그걸 시도했다. 키 작은 선수들이 많은 모비스는 이 전략으로 시즌 초반 재미를 봤다. 곧바로 다른 팀들이 이걸 따라 하더라”고 말했다.

이번 시즌 프로농구 최고의 화제는 KCC다. KCC는 키 2m21㎝의 하승진을 비롯해 최고의 외국인 센터로 꼽히는 테렌스 레더(2m), 아이반 존슨(2m)이 버티고 있는 강팀이다.

SK가 최근 변칙 작전으로 KCC를 잡으려다 실패했다. KCC를 상대로 스타팅 멤버 전원을 후보 선수로 내보내 상대 힘을 뺀 뒤 1쿼터 도중 베스트 멤버를 한꺼번에 투입하는 작전이었다. 방 대표는 “그 방법이 주전들의 파울을 아끼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효과는 봤을지 모른다. 그런데 높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팀은 무조건 전면 압박수비를 해야 한다. SK는 그날 프레스를 한 번도 걸지 않았다. 그게 패착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SK의 신선우 감독은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때 주전 센터였고, 방 대표는 당시 대표팀 감독으로서 장신 군단 중국을 잡고 금메달을 따냈다.

KCC, 혹은 중국처럼 센터진의 높이가 막강한 팀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무조건 프레스로 밀고 나가야 한다. 또 1~4쿼터 내내 같은 수비 전략을 썼다가는 백전백패다. 상대 센터진의 조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모든 경우의 수에 맞춘 수비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감독이 머리가 터지는 것”이라며 웃었다.

한국 농구에 던지는 화두 ‘기록’
방 대표는 96년 에세이 『농구 만들기, 인생 만들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책을 냈다. 『실전현대농구』(97년), 『바스켓볼』(99년), 『수비 농구』(2002년), 『공격 농구』(2004년), 『농구 바이블』(2007년) 등이 있다. 전공 도서인 『사회체육프로그램론』과 『스포츠미디어론』도 집필했다.

그는 “학교에서 저서를 낼 때마다 연구비를 지원해줬지만, 사실 미친 사람처럼 자료를 모아서 책을 내 봐야 돈은 안 된다”고 웃었다. 그런데도 그가 책을 내는 데 매달리는 이유는 단 하나, “한이 맺혀서”다.

방 대표는 “27세 때 코치를 시작했는데, 당시 농구 관련 이론서가 전무했다”고 말했다. 그는 “책은 고사하고 메모조차 구할 수 없었다. 모든 게 구전(口傳)이었다. 그때부터 매일 코치 일기를 적으면서 기록을 남겼다. 영어 원서를 구해서 봤고, 외국 코치협회에 가입해서 계간지를 받아 봤다. 나는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을 책으로 남겨서 후배들에게 다 주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방 대표는 자신이 쓰는 전술이나 전략을 ‘밥줄’이라고 생각하고 꼭꼭 숨겨두는 지도자들에 대해 쓴소리도 했다. 방 대표는 “비밀이랄 게 어디 있나. 자신들이 아무 작전이 없다는 게 들통날까 무서운 게 아니냐”면서 “이번에 『전략 농구』를 낼 때도 유재학·이문규 감독에게 노하우를 모두 공개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NCAA(미국대학체육협회) 농구 토너먼트에서는 파이널 4가 가려지면 전술 설명회를 한다. 코치협회 소속 지도자들과 미디어가 모두 모여 네 팀의 전술을 듣고, 또 훈련장도 공개한다. 프로농구에서도 챔피언 결정전이 끝나고 전술 설명회를 열면 재미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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