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CEPA로 세계 4위 소비시장 진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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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20면

델리 시내 중심 상가인 코넛 플레이스의 한 의류 매장. 신년 세일 쇼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신인섭 기자

인도 수도 델리의 번화가인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31년 신도시 건설의 중심 지표로 조성된 대규모 상가다. 광장을 가운데 두고 동심원 모양으로 웅장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주말인 지난 18일 오후. 코넛 플레이스는 부상하는 거대 시장, 젊은 인도의 모습을 확실히 보여줬다. 각종 해외 유명 브랜드와 인도 고유 브랜드가 총 집합된 의류·가방·신발가게, 거리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파는 이들도, 물건을 사러 나온 이들도 20~30대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고 상가 주변 주차장은 현대 상트로, 마르티스즈키 등 소형 차들로 꽉 들어찼다.

거대 시장 인도에 부는'경제 한류'

영국 BBC방송의 '텔레토비' 동산 모양의 광장 잔디공원에는 젊은 남녀·가족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공원 지하상가인 팔리카 시장(Palika Bazar)은 명절 대목 때의 동대문·남대문 시장을 연상시켰다. 게임기와 전자제품·의류가게로 다닥다닥 붙은 상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공원 옆 100m 정도 이어진 야외 시장 역시 젊은 상인들과 쇼핑객들이 뒤엉켰다. “골라, 골라” 비슷한 호객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베누 스리니바산 인도 전경련 회장은 “한국의 기업들이 인도 시장과 업계에 매우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고 했다. 신인섭 기자

17일 저녁 델리 외곽 신도시 구르가온 풍경도 마찬가지. 백화점·쇼핑몰에는 활기가 넘쳤고, 최고급 갤럭시 호텔의 식당가에는 말끔하게 차려 입은 가족 단위 손님들이 테이블이 빌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 전자업체 비디오콘의 박만경 상무는 “2~3년 전부터 외식을 하는 인도 중산층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인도에서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빈민층은 4억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지갑을 쉽게 열 수 있는 중산층도 3억 이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세계은행·한국무역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12억 인구 가운데 가처분 소득을 1000만 루피(약 22만 달러) 이상 보유한 고소득층은 2002년 2만 가구에서 2005년 5만3000가구로 증가했다. 가처분 소득이 5000~3만5000달러인 인구는 3억10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첸나이에서 만난 베누 스리니바산 인도 전경련 회장은 “인도 중산층의 힘이 커지고 있고, 정부의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며 “인도 국민의 약 30~40%를 중산층으로 본다”고 했다.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규모는 각각 30%라는 게 스리니바산 회장의 설명이다.

현대차 소유는 중산층의 상징
2000년 이후 인도가 성장 트랙에 올라선 뒤 점차 두텁게 형성되고 있는 중산층을 한국의 기업들이 파고들고 있다. 인도 사회에서 ‘현대차’는 “나는 중산층”임을 나타내는 상징처럼 됐다. 96년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 항구도시 첸나이에 진출한 현대차는 대표 차종인 상트로·i10의 선전에 힘입어 진출 10여 년 만에 인도 자동차 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했다. 현대차의 점유율은 21%. 연간 60만 대를 생산하며, 인도 내 자동차 업체 가운데 최대 수출 업체로 성장했다. 현지인들이 터번 등을 쓰는 것을 고려해 자동차의 천장을 높이는 등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인도 가전제품은 LG전자와 삼성전자가 장악했다. 점유율 1, 2위다. 공항에서부터 시내 레스토랑·사무실·대학 교수 연구실 어디서든 삼성·LG 에어컨을 볼 수 있었다. 델리대 김도영 교수는 “인도 사회에서 대학 교수들은 중산층에 속하는데 현대차·LG·삼성 때문에 중산층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농담을 할 정도”라고 했다. “한국 제품을 쓸 수 있는 정도라야 중산층이 됐다는 의미”라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인도에 진출한 우리 기업 수는 모두 380개다. 델리 인근 164개사, 첸나이 150개사, 뭄바이·푸네 50개사, 벵갈루루에 12개사가 진출해 있다. 대체로 LG전자·삼성전자·현대차·두산중공업·쌍용건설 등 대기업이 진출하면 그와 연관된 중소기업이 동반해 터를 닦는 형태라고 한다. 현대차가 있는 첸나이의 경우 우리 자동차 부품 업체 100여 개가 인근에 몰려 있다. 하지만 진출한 뒤엔 중소기업들이 자생력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한국 대기업 의존도가 30%로 낮아졌다는 것이다.

포스코는 지난 2005년 부바네스와르주 오리사에 11조원을 투자, 연간 1200만t 규모의 철을 생산한다는 일관제철소 프로젝트를 발표한 뒤 추진해왔다. 중앙정부와의 협의는 잘 돼왔지만, 토지 보상을 놓고 지방정부·현지 주민과의 이견으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포스코의 도상무 인도법인장은 “오리사 현지 협의를 추진하면서 영업망 구축 등 부가 사업 기반을 닦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인도 서부 마하라슈트라주에 연속아연도금 공장도 건설할 계획이다.

인도 기업가들은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한국 기업의 진출을 어떻게 볼까. 첸나이 이륜차 생산업체인 TVS 회장을 맡고 있는 베누 스리니바산 인도 전경련 회장은 “포스코·삼성·LG·현대차 등 한국 기업들이 인도 시장에서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면서 “CEPA는 한국 기업들에 인도가 이제 활짝 열려 있는,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이 가능한 시장이라는 사인을 던져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의 한국 제품 수입은 늘어날 것이고, 세계 전체 시장을 상대로 영업하는 인도의 엔지니어링 센터, 데이터 관리 센터들과 한국과의 협력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첸나이의 현대차를 어떻게 보나.
“현대차가 인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현대차의 신차 개발을 위한 노력, 공장을 운영하는 방식 등은 세계 최고다. 공장 및 공급 체인 운영, 품질경영은 인도 시장과 업계에 매우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인도 경제의 걸림돌은 뭔가.
“인프라 부족과 규제다. 공장 건설, 토지 수용 등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법률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국과는 자유무역이 가능해졌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주와 주 사이엔 자유무역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마다 세금체계도 다르고, 몇 겹의 법률과 규제가 공장 운영에 제동을 걸고 있다."

스리니바산 회장은 첸나이의 명예 한국 총영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인도 사람들은 현대·삼성·LG는 알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양국 간 100년 이상 문화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년 전 첸나이 영사관 설치 논의가 있었을 때 문화관 격인 ‘인도-한국(InKo) 센터’를 만들자고 건의했다”고 했다. 스리니바산 회장은 현대차와 TVS 등 민간 영역이 센터에 자금을 댄다고 했다. 그는 “인도와 한국은 이제 막 교류를 시작하는 단계”라며 “인도-한국 센터가 두 나라 간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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