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미 협상 이후 남는 과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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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과 미국이 어제 공동성명을 통해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 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전쟁 이래 반세기 동안 지속된 양측의 적대관계 청산은 지금 진행 중인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과 더불어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에 해빙 무드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남북한의 교류협력과 평화구조 정착에도 기본적으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북간에는 아직도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 한 대 놓이지 못한 상황에서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 로 바꾸자는 북.미성명에 넋을 놓고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6.15 공동선언 5개 항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은 '평화' 나 '긴장 완화' 표현이 북.미 공동성명에 포함된 것은 북한이 여전히 군사적 긴장완화 문제만큼은 남한을 제치고 미국과 상대하려 하고 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북.미관계의 획기적 개선이 남북관계 진전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이제부터는 우리 정부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외교력과 협상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그동안 남북관계의 급류에 밀려 소홀했던 감이 있는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중국 등 주변국과의 외교에도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의 실질적 당사자로서도 그렇고, 현재의 첨예한 군사대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평화체제 구축은 북.미가 아닌 남북을 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정부가 앞으로 북한은 물론 미국에도 이 점을 명확히 할 것을 촉구한다.

공동성명은 1994년의 제네바 북.미 합의문을 충실히 이행하며, 서로 자주권을 존중하고 내정에 불간섭한다는 내용도 명시했다. 또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언급하고 1주일 전의 테러반대 성명을 재확인했다. 반면 북한 미사일 문제는 '미사일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모든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 이라고 기존의 발사 유보 약속을 답습하는데 그쳐 전체적으로 북한이 '카드' 를 남겨둔 형태가 됐다.

게다가 북한은 미국과 '경제협조와 교류' 를 발전시키기로 했고 '인도주의 분야의 협조사업' 도 챙겼다. 한마디로 북한식 '벼랑끝 외교' 가 개가를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93년 북한이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펼친 일련의 벼랑끝 외교로 체결된 제네바 합의문은 결과적으로 북한에 지어줄 경수로 비용 대부분을 우리가 부담하게끔 낙착됐다. 이번 공동성명을 대하면서도 자칫하면 우리만 또 '봉' 이 되지 않을지 솔직히 말해 불안하다.

이번 공동성명은 98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본격화한 미사일 협상과 '페리 프로세스' 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북한이 NPT 탈퇴선언으로 경수로를 챙겼듯이 이번에는 미사일 한 방으로 남한을 배제한 채 미국과 평화협정을 맺고, 나아가 각종 경협에 따른 부담은 한국이 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정부는 이번 북.미관계 개선이 6.15선언 덕분이라고 자화자찬만 할 게 아니라 이런 부정적 방면의 가능성과 국민의 불안감을 십분 감안해 상황변화에 똑바로 대처해야 한다.

북한과 미국이 '평화보장체계' 를 성명에 담은 이상 주한미군의 위상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북한이 주한미군 주둔을 공식적으로 양해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유엔사 휘하의 현 체제는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점은 우리 국민의 안전보장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만큼 원칙에 입각해 신중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 페이스에 끌려가선 안되며, 기본적으로 상호방위조약에 기초한 한.미관계에 의거해 문제를 풀고 북한에도 이를 납득시켜야 옳다고 본다.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에는 '평화' , 남한에는 '통일' 을 각각 내밀면서 자신들의 '노선' 을 관철하려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공동성명을 보더라도 이런 우려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 정부가 더욱 냉철히 대처해야 함은 물론 일반 국민도 새롭게 조성된 국면을 차분하게 지켜보고 판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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