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화해' 북·미 공동성명 의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미간 합의는 한반도에서 평화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 으로 기록될 것이다.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을 받아들여 역사의 물줄기를 화해.협력시대로 돌려놓은 지 4개월 만에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평화시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金위원장이 조명록(趙明祿)특사를 워싱턴에 보내 미국과 국제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더니 기어이 '큰 판' 을 벌인 셈이다.

북한과 미국은 공동성명에서 "북남 최고위급 상봉에 의하여 한반도의 환경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인정" 하고 "관계를 전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이 조성" 됐다고 언급했다.

이는 남북관계의 급진전으로 마련된 새 분위기를 타고 북.미간 현안을 풀면서 수교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북.미 합의의 이면(裏面)의 주인공은 金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 당시 金위원장이 金대통령 덕분에 '은둔에서 해방' 됐다고 표현한 것이 새삼 떠오른다.

이번 합의는 세 가지로 추려진다. 첫째, 상대에 대한 적대시를 포기하고 자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원칙을 지키면서 경제교류.협력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둘째, 정전협정체제를 '공고한 평화보장체계' 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4자회담을 비롯, 여러가지 방안을 활용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 주한미군 문제는 직접 거론치 않음으로써 현단계의 과제와 장기과제를 구분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보여줬다.

셋째, 미사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대목이다.

북한이 그동안 요구해온 미사일 수출중지에 따른 대가(3년간 10억달러씩)와 장거리 미사일 발사의 '조건부' 중지(인공위성 대리발사)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경협차원에서 미국이 북한의 에너지난을 도울 가능성은 남아 있다.

연락사무소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본격적인 국교정상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반도에서 급격한 기류가 휘몰아치게 된 중심에는 金위원장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고난의 행군' 시기로 일컬어지는 어려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 핵무기.장거리미사일 개발로 한반도를 극도의 긴장지역으로 만들더니 이를 '배수진(背水陣)' 으로 삼아 미국과 극적인 관계개선에 들어가는 외교력을 보이고 있다.

최근 한반도.유럽.아태지역에 대한 북한의 외교행보를 보면 전광석화(電光石火)를 연상시킨다.앞으로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에 앞서 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는 데다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총리의 평양나들이도 이어질 전망이다.

평양이 '정상(頂上)외교' 무대가 될 것이다. 또한 金위원장 자신이 서울과 워싱턴을 순차적으로 방문해 국제사회에 본격 진출하는 새 국면이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새 국면이 펼쳐지면서 우리 정부는 북한과의 평화문제 협상 및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이라는 중대한 양대 과제를 안게 됐다.

유영구 북한문제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