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인문학이 위기라지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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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책의 한 쪽을 가르키는 말은 영어로는 페이지(page)이고, 라틴어는 파지나(pagina)라고 합니다. 두 단어는 본디 에스팔리에(espalier)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포도 넝쿨이 뻗어나갈 수 있게 만든 얼기설기한 시렁' , 그것이 에스팔리에라고 합니다.

책과 포도나무 시렁, 쉬 연결되지 않는 두 이미지 사이에는 옛사람들의 속 깊은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포도밭에서 포도 맛을 보듯 책의 한줄 한줄을 음미했다는 것이죠. 몇년 전 환경잡지 '녹색평론' (통권 37호)에서 글동냥했던 말 입니다.

국내 잡지 중 가장 순결한 환경 근본주의의 신념을 전하고 있는 그 잡지는 당시 녹색 사상가이자 현인(賢人)인 이반 일리치를 소개했더랬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옛사람들이 어떻게 책을 읽었는가에 관한 일리치의 언급이죠. 옛사람들이 책을 읽는 행위란 자신의 존재를 건 삶의 한 방식이었다는 것, 따라서 '하이퍼 스페이스 속의 수음행위' 로 변한 현대인들의 독서습관과는 근본에서 달랐다는 겁니다.

책읽기란 몸을 가진 책과의 접촉을 포함한 신체 활동이었고, 인쇄된 텍스트 너머와의 교류를 전제로 한 그 무엇이었다는 얘깁니다.

멋진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들어 부쩍 묘한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겁니다.

"혹시 이러다가 중세 양피지 책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일리치가 말했던 '포도 맛을 음미하듯 책을 읽는 행위' 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할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다시 오는 것 아냐?" 근거없는 걱정이 아니고, 올해 출판계와 독서시장의 이상 징후는 정말 우려할 만 합니다.

대량인쇄 시대의 종말이 걱정될 정도이고, 출판 시장 규모의 절대적 축소, 그중 인문서를 포함한 양서들의 실종 현상이 눈에 띕니다.

보실까요? '단군 이래 최대 불황' 이라는 엄살은 10년전에도 출판계에 유포됐던 말입니다.

하지만 불과 2~3년전 까지도 밀리언셀러가 한해에 몇권씩은 있었더랬습니다. 하지만 올해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들은 정확하게 예전의 20% 수준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가시고기' '국화꽃 향기' 같은 대중소설이 판매량 20만권 내외에서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4개월전 나온 김진명의 '코리아 닷컴' 도 예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판매량과는 비교되지 않는 수준 입니다.

본디 베스트셀러를 두고 말이 많지만, 베스트셀러란 책시장 전체에 활기를 넣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이 통에 인문서를 포함한 지식사회에 꼭 필요한 양서들도 더 혹심한 추위를 타고 있읍니다.

지난해까지도 기본부수 1천권을 찍더니 요즘은 7백권 내지 그 이하의 수준으로 다시 줄었다는 겁니다.

출판인회의에서 펴내는 격월간 '책과 사람' (9.10월호)이 음울한 제목을 내건 특집 '인문학 위기 그 이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를 낸 것도 그런 연유일겁니다.

7백권이라니, 과연 대량인쇄의 시설이 굳이 필요한가 싶은 '말도 안되는 수치' 입니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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