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박정기 전 경북대 총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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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평생 수학 연구 한길에만 매진하신 분입니다. 인자하고 소탈하면서도 원칙에 충실한 올곧은 선비셨죠. "

지난 6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한 학술원 회원 박정기(朴鼎基.전 경북대 총장)옹. 그에게서 수학을 배운 조용(曺鏞.73.영남대 명예교수)씨는 "제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고 막걸리를 마실 정도로 인자하고 소탈한 성품이었지만 강의 열성은 대단했다" 고 회고했다.

해방 직후 朴옹에게 강의를 받은 안세희(安世熙.72.학술원 회원)전 연세대 총장은 빈소를 찾아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을 잃었다" 고 애도했고, 서울대 제자 박을룡(朴乙龍.75.학술원 회원)씨는 불편한 몸으로 장지까지 동행하며 눈물을 쏟았다.

경남 거창의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고인은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와 일본 동북제국대(東北帝國大)에서 수학을 공부한 뒤 우리나라 수학 발전의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다.

해방 후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에서 강의하다 1952년 경북대 수학과를 창설한 고인은 80년 정년퇴직한 뒤에도 여든까지 강의하며 오로지 학문 외길만을 걸었다. 특히 그의 강의는 정렬적이고 엄격하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천장을 쳐다보며 강의하는 특이한 버릇이 있었고 늘 옷소매는 분필 가루로 뒤범벅됐다.

제자 김한수(金漢洙.66.경북대 명예교수)씨는 "선생님 강의를 게을리 받는 건 엄두도 못냈고 다른 교수들 강의라도 거부하면 책상을 치며 불호령을 내렸다" 고 말했다.

이론 중심의 수학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술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58년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지인 영문판 '경북수학지' (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는 그가 남긴 가장 큰 학문적 업적이자 유산. 일년에 두 차례씩 발간하는 이 잡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저널로 자리잡았다.

총장 재직(68~71년)중 강의를 잠시 중단했을 때에도 공대와 상대를 잇따라 설립해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적잖은 역할을 담당한 산업인력 배출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교학처장을 지낸 이상로(李相魯.76)씨는 "공부밖에 모르던 분이어서 실무적인 학교 운영은 주로 처장들에게 일임했다" 며 "찻값.식사비 등은 직접 계산하는 등 지나칠 정도로 공과 사의 구분이 분명했다" 고 말했다.

고인의 학자로서의 삶은 후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장남 영호(英虎.54)씨는 미국 우주항공국(NASA)산하 제트추진연구소(JPL)의 선임연구원으로, 둘째 영배(英培.50)씨와 세째 영철(英哲.46)씨는 각각 계명대 화학과.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급히 귀국한 영호씨는 "어릴적 우리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셨고 하이킹도 자주 했다" 며 "현대 문명은 인간성을 복잡하게 한다며 자연을 좋아했고 자연의 근본적인 부문에 접근하라고 충고하시곤 했다" 고 말했다.

여든을 넘기면서 강의마저 그만둔 고인은 총장직을 그만둔 뒤 자식들에게 폐가 된다며 직접 지은 2층 단독주택에서 부인과 단둘이 지냈다. 고인은 특히 자식들과 새로 난 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을 즐겨했다.

사진만 보고 중매로 결혼했다는 부인 강신주(姜信珠.80)씨는 "고지식해서 아내에 대한 애정표현은 부족했지만 부부간의 믿음은 돈독했다. 순수한 자유주의자로 사셨다" 며 남편을 마음에 묻었다.

경북대 수학과 동창회는 朴옹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할 계획이다.

대구=안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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