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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경제] 은행이 왜 아빠 회사 문닫게 해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경기도 분당에 사는 김지수(15)양은 몹시 우울해요. 지수양의 아버지께서 다니시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 때문이에요. 전에도 몇차례 이런 일이 있었지만 이번엔 은행이 단단히 벼르고 있다며 아버지께선 한숨만 쉬세요.

지수양은 이해가 안됐어요. 10년 넘게 아버지께서 잘 다니신 회사인데 은행에서는 왜 억지로 문을 닫게 할까요.

게다가 신문을 보니 아버지 회사뿐만 아니고 1백50~2백개나 되는 회사를 대상으로 문을 닫게 할지 여부를 가린다고 해요.

많은 회사를 문닫게 하면 대출을 해준 은행도 돈을 돌려받지 못하니까 손해가 아닌가요. 물론이에요. 하지만 구조조정이란 미래의 밝은 전망을 위해 지금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스템을 바로 잡는 작업이거든요. 그러니 일시적 어려움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는 셈이랍니다.

이번에 은행으로부터 죽느냐 사느냐 여부를 심판 받아야 하는 1백50~2백개 기업은 한마디로 빚이 너무 많아서 장사로 번 돈으로 이자도 못갚고 있는 회사들이에요.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미친다는 좀 어려운 용어가 바로 그 뜻이에요. 결국 그런 기업은 이자를 내기 위해 빚을 더 얻어야해 빚이 갈수록 불어날 수밖에 없는 형편인 거죠.

따라서 앞으로도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사라면 대출을 끊어 문을 닫게 하는게 은행으로서는 더 큰 손해를 막는 길이 되겠지요.

여기서만 그치지 않아요. 은행은 가망 없는 회사에 대줄 돈을 기술이 있고 장사를 잘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회사에 돌려줄 수 있겠죠. 물건은 잘 팔리는데 돈이 없어서 공장을 넓히지 못하던 회사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 기계를 들여와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팔 수 있을 거예요.

당연히 돈도 더 많이 벌거고 머지 않아 은행에 이자와 함께 대출을 갚을 거에요. 그러면 은행은 이 돈을 또 다른 회사에 빌려줄 수 있게 되죠.

공장을 돌려봐야 이자도 못갚는 회사를 문닫게 함으로써 은행 돈이 값싸고 질좋은 물건을 만들어 파는 회사에 가게 됐어요. 이렇게 되면 일자리도 늘어나겠죠.

지수양의 아버지가 지금 다니시는 회사를 그만 두시더라도 일자리가 늘어나니까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도 있겠죠.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가망이 없는 회사를 솎아내 문을 닫게 함으로써 돈이 장사를 잘할 회사로 몰리게 하는 게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하는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예요.

우리 몸에 있는 간이 피 속에 섞여있는 독성물질을 걸러내 몸 밖으로 배출시킴으로써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듯이 은행도 부실기업을 걸러내 시장에서 내보냄으로써 경제를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거죠.

지수양은 그래도 의문이 남았어요. "그렇다면 은행이 알아서 하나씩 조용히 평가하면 될텐데 왜 정부까지 나서서 한꺼번에 1백50~2백개나 되는 기업을 심판하라고 법썩일까요. "

은행이 가망없는 기업을 걸러내는 정수기 기능을 잘 하면 정부까지 나서서 요란을 떨 필요가 없겠죠. 그런데 이렇게 모든 은행이 많은 회사를 한꺼번에 심판을 하자고 하는 이유는 이 정수기 기능이 고장났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집에서 쓰는 정수기도 더러운 물을 한번에 많이 정수하려고 하면 고장이 나잖아요. 지금 우리나라 은행들이 그래요.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들은 빚을 얻어다 공장을 넓히고 사람을 늘리는데만 급급해왔어요. 이익을 얼마나 더 내느냐 보다는 얼마나 덩치가 크냐가 더 중요했지요.

우리나라 경제가 잘 돌아갈 땐 문제가 없었지만 외환위기가 닥치자 빚이 많은 회사들이 줄줄이 쓰러졌어요. 자동차와 가전제품을 파는 대우그룹도 그중에 하나였죠.

이런 기업이 너무 많고 덩치가 크다보니 개별 은행이 감당하기가 벅찼어요. 가망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대출을 끊었다간 기업과 함께 은행도 문을 닫을 판이니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대출을 해주며 기업의 생명을 연장해온 거죠.

한꺼번에 1백50~2백개나 되는 기업을 심판대에 올려놓은 것은 이 때문이에요.

이번 기회에 문제가 있는 기업은 다 정리하고 넘어가야 은행의 정수기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거예요.

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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