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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시장경제모델 빨리 찾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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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좌파적" "반시장적"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적". 최근 들어 야당총재, 국회예산정책처장, 일부 경제학자 등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사용한 용어다. 그렇지만 정부 정책은 그러한 비판과는 거리가 멀게 보인다.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여전히 지향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정부 부문 비중도 매우 작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지출 비중은 30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이 40.7%며 유로 사용국가 평균은 49%에 이르지만 우리나라는 24.3%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책을 펴는 국가와 달리 세금과 복지비 지출 비중이 더욱 작다. 세금과 건강보험료.연금보험료 등을 포함하는 국민부담률은 GDP 대비 24.1%에 불과해 OECD 회원국 평균 36.9%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정부 비중이 작은 상황에서 복지비 지출을 증가시키는 등 약간의 형평성을 추구하는 정책만 펴도 좌파로 보이겠지만 선진국 기준으로 보면 아무리 세금을 많이 걷고 사회보장성 정부 지출을 늘린다고 해도 좌파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다. 만일 정부의 시장개입을 반시장적이거나 좌파로 규정한다면 지난 30년 동안 수출 주도의 강력한 정부 개입 정책을 편 과거 군사정부는 더더욱 좌파라 해야 할 것이다. 토지 공개념을 도입한 노태우 정부를 좌파정부라고 할 수 있는가.

정부 개입을 반시장적이라 하여 매도해선 안 된다. 독과점 폐해, 불공정 거래, 정보독점 등 시장실패는 정부가 나서서 교정해야 한다. 전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지는 허위과장 광고, 담합, 가격 부풀리기, 떴다방, 기획부동산 등 온갖 투기와 불공정 거래도 시장경제라는 명분 아래 그대로 방치해도 될까. 인구밀도가 전 세계에서 제일 높고 토지 공급이 제한된 공급자(토지소유자) 우위 시장에서 시장원리에 따라 부동산 투기를 내버려 둬도 될까.

공정한 시장경기 규칙이 없는 시장경제는 오히려 문제를 야기한다. 시장경쟁도 체급별 경쟁이어야 한다. 플라이급과 헤비급이 같이 싸울 수는 없다. 왜소한 한국의 금융산업이 막강한 국제자본과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는 것은 승패가 이미 난 싸움과 마찬가지다. 실물 부문과 달리 금융 부문의 경쟁기반이 채 갖춰지기도 전에 글로벌 시장경제라는 명분 아래 이뤄진 금융외환시장 개방은 IMF 외환위기를 초래했을 뿐이다.

WTO 글로벌 시대에서 살아가기 위한 대전제는 시장경제의 창달이다. 그러나 맹목적 시장경제를 외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명목 아래 미국식 월스트리트 자본주의를 여과 없이 도입한 아시아의 촉망받은 4마리 용은 어떻게 됐는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겨우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벗어났지만 2003년 말 현재 홍콩.싱가포르.대만은 1인당 국민소득이 97년 외환위기 수준을 여전히 만회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은 외국인의 손에 다 넘어가 있다. 국제자본의 인수.합병 시도, 단기이익 위주, 고배당 요구는 한국 기업의 성장 동력과 투자 여력을 감퇴시키고 있다. 월스트리트식 외국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 재벌체제의 장점도 인정하는 한국형 시장경제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 점에서 정부의 새로운 역할이 더 중요하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겨우 회복한 현재의 경제발전단계에서 정부의 전략적 주도는 필요하다.

경제는 심리에 의해 좌우된다.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기업 투자가 부진한 이유 중 하나도 정부에 대한 불필요한 정체성 시비와 좌파논쟁으로 경제 주체에게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설령 정부 정책에 그러한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럽식" "정부주도적" "복지주의적" "형평주의적" 이라고 부를 정도에 머물고 있다. 사실 좌파라고 굴레를 씌우면 공산주의를 연상시키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국민을 자기세력으로 결집할 수 있는 효과가 있지만 이제 소모적인 좌파논쟁은 그만두고 사실에 근거한 경제성장의 대안을 마련할 때다.

임배근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