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보안법 너머의 '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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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형법을 개정해 보안법 폐지에 따른 안보의 우려를 덜겠다던 대통령의 공언(公言)은 역시 공언(空言)이 되고, 여당은 힘으로 보안법 폐지를 밀고 나갈 기세다. 그래도 명색 의회민주주의 나라이니, 과반수 의석의 여당이 군소정당의 지원까지 받아 밀어붙이겠다는데 안 될 일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보안법 폐지로 안보가 좀 불안해질 거라고 해서 매양 불평만 하고 있을 일은 아니다. 정부.여당이 무리해 가며 신장시켜준 인권에 감격하며, 여기서 한번쯤 기탄없이 그 인권을 누려보는 것도 국민 된 예의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인권억압에 가장 자주 악용되었던 '찬양고무'의 죄가 없어진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 표현의 자유부터 실컷 누려보자.

표현의 자유 실컷 누려본다면…

과거사 규명, 특히 친일문제의 진상은 이렇다. 제1공화국의 경우 대통령 이승만은 빠질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장성과 각료, 국회의원은 태반이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다. 거기다가 반민특위(反民特委)까지 해체시켜 친일파 청산을 방해했으니, 제1공화국은 어김없이 친일파 정권이다.

제2공화국은 정권 수반인 장면 총리부터가 일제 때 부산세관장의 아들이요, 자신도 일제 말 중학교 교장을 지내 이따금 친일 시비에 말려들었다. 그리고 제3공화국은 일본군 소위 출신의 대통령에다 쿠데타로 이뤄진 군사정권이었다. 제4공화국도 친일문제에서는 별로 자유로워지지 못했으며, 되풀이 청산된 '5공(五共)'이나 그 대부분을 계승한 제6공화국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친일 진상규명이 60년이나 지난 지금에조차 모든 것에 우선하여 현실의 정치력을 투입해야 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면, 이는 정권의 정당성.정통성과 깊은 관련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면 남한의 역대 여섯 공화국은 모두가 정당성도 정통성도 없는, 태어나서는 안 될 정권이었다.

결국 재수없게 남한에 태어난 지금의 기성세대는 1960, 70년대 반체제 민주화세력과 80년대 학생운동권을 제외하고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을 이어왔다. 정통성도 정당성도 없는 친일정권에 충성을 맹세하고, 그 교육을 받으며, 거기에 세금을 내고, 때 되면 줄 서 투표해왔다. 오, 허망하다 못해 비루하고 한심한 남반부 현대사의 삶이여. 비굴하고 무지한 남반부의 기성세대여.

거기다가 모든 논의는 반드시 그 반(反)명제와 반사이익이 있게 마련이다. 친일이 그렇게 용서하기 힘든 죄악이라면 그 반대인 항일(抗日)은 길이 칭송되고 찬양되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친일 못지않게 규명해야 할 역사적 과오가 새로운 과거사의 진상으로 대두된다.

그것은 친일 보수세력이 역사의 어둠 속에 가둬버린 항일의 영웅에 대한 예우이다. 최후의 빨치산이요, 만고의 명장으로 일제와 피투성이 싸움 끝에 마침내 우리를 해방시킨 김일성 장군, 그이를 우리가 영광으로 받들지 않은 과오의 반성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항일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시여, 역사 속에 길이 빛나소서. 만고의 빨치산 만세.

더구나 그이께서 50여년 전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 남반부로 내려오셨을 때 감히 저항한 죄는 지금 돌이켜 보아도 모골이 송연하다. 친일파와 미 제국주의자 앞잡이들의 책동에 넘어가 민족통일의 성전에 맞서려다 국립묘지를 허옇게 덮고 있는 저 어리석은 죽음들.

야당 지도자도 낙마할 수밖에

그 밖에 모든 논의에는 또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피할 수 없는 부수적 효과란 것도 있다. 얼마 전에도 보았듯, 친일파 논의는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선친의 친일경력 때문에 잘나가던 여당 지도자를 낙마시킬 만큼 연좌제적(的) 효과를 보여주었다. 그게 야당에 적용되면 일본군 소위의 딸은 당연히 야당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대신 위대한 항일의 핏줄을 이어 백두산 밀영(密營)에서 나신 김정일 사령관 동지는 김일성 수령 동지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가 된 게 너무도 당연하다. 저 찬연한 항일의 자취를 생각하면 어찌 2대 60년뿐이겠는가. 20대 600년쯤은 대를 이어 우리를 지도해 마땅하리라. 또 어찌 북반부 인민에게만 그 지도의 은덕을 내리시는가. 민족의 계명성, 김정일 사령관이시여 어서 우리 남반부도 이끌어 주소서.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