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관 '질병 조회'남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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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호실.경찰.국정원 등 주요 정부 기관이 직원 채용이나 수사 때 개인 질병 정보를 가져다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누구나 드러내길 싫어하는 개인 정보인 질병 기록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제공되는 것은 사생활 침해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다.

◆ 실태=청와대 경호실은 지난 6월 경호원을 채용하면서 지원자 김모씨 등 209명의 법정전염병, 마약 관련 질환이나 정신질환, 기타 만성질환 등에 관한 정보를 건강보험공단에서 받아갔다. 경기도 모 경찰서도 보험 사기혐의로 고소된 윤모(48)씨를 수사하면서 최근 1994~2002년 2월의 이비인후과 진료기록을 가져갔다. 동사무소에서 의료급여 대상자를 선정할 때도 질병 정보를 쓴다.

건보공단이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1~8월 모두 5만9939명의 환자 진료기록이 다른 정부기관에 제공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이 1만4338건으로 가장 많고 ▶검찰 9637명 ▶법원 2981명 ▶병무청 129명 등이었다. 이 밖에 국정원.의문사진상규명위.부패방지위.해양수산부 등 기타 기관에 1946명의 정보가 제공됐다. 지난해에도 6만1830명의 질병 정보가 외부에 제공됐다.

◆ 문제점과 대책=대외법률사무소 전현희 변호사는 "대통령 경호원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채용에서 질병 정보를 조회하는 것은 인권침해 소지를 안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호실이 내세운 근거는 경호실법 6조와 보안업무 규정(신원조사)이다. 경호실법은 '실장은 직무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공공단체장에게 기타 필요한 협조를 요청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도 '피진정인 또는 피진정인의 소속 기관.시설.단체 등에 대한 관련 자료 또는 물건의 제출요구'조항을 두고 있다. 전 변호사는 "질병 정보를 가져가는 법률적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규정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남용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찰이나 검찰은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자료를 가져간다. '범죄의 수사와 공소 제기 및 유지에 필요한 경우'로 막연하게 규정돼 있다. 2002년 경찰이 운전면허증을 발급할 때 건보공단에서 대상자의 정신병력을 조회하다 인권침해라는 지적이 나오자 자료 제공이 금지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진료비 부정청구나 병역 비리 등을 수사할 때 불가피하게 진료정보를 활용하고 있으며 누설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문옥륜 교수는 "개인 질병 정보는 어떤 경우에든 보호받는 게 맞다"면서 "정보 제공을 원칙적으로 금하되 꼭 필요한 경우를 구체적으로 열거하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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