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획 한획…선승의 자유 서렸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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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 조선 후기의 승려인 아암 혜장이 남긴 ‘일한사탑(一閒四榻) 무진여화(無塵如畵)’. ‘방 한 칸에 의자 네 개, 티없이 맑기가 그림같다’로 풀이되는 이 글씨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 도반의 선기(禪機)와 자유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스님이 붓을 들어 글씨를 썼을까. 절집에는 전해오는 서예품이 많이 남아있을까.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지 1500년 세월을 헤아리는 오늘, 중생이 품을 법한 질문이다.

8일 국립청주박물관(관장 이내옥) 청명관 기획전시실에서 막을 올리는'고승유묵(高僧遺墨)-경계를 넘는 바람'전이 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통일신라로부터 고려와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학덕이 높았던 선승 120여 명의 글씨 150여 점을 모은 이 특별전은 한국서예사를 선필(禪筆)로 더듬는 첫 자리다.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되는 희귀 자료라 학술적인 면에서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시 제목 '경계를 넘는 바람'이 선필이 지닌 뜻을 풀어놓는다. 정신의 절대자유를 얻은 선사가 무아의 경지에서 먹물 삼매경에 빠져 남긴 글씨는 흔히 말하는 명필과 득의의 기준을 초월해 그 너머 바람처럼 자유롭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닫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의 큰 세계에서 선승은 글씨를 쓸 때 상(相)조차 만들지 말라고 가르친다. '글씨는 그 사람'이란 말처럼 수행을 거쳐 깨달은 그만큼이 먹을 빌려 나타난다는 것이다. 선필을 감상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여서 보는 이의 마음을 치고 들어오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

전시는 크게 선필의 역사, 선필의 성격과 종류, 고승과 선비의 교유로 나뉘어 꾸려졌다. 통일신라시대 김생(711~?) 글씨의 탁본에서부터 만해 한용운(1879~1944)의 시가 수록된 '卍海筆帖'까지 법을 깨고 나온 고졸과 파격의 글씨가 그들먹하다. 특히 아암(兒巖) 혜장(惠藏.1772~1811)의 유묵은 거침없으면서도 간결명료하며 통쾌하고 고고해서 선필의 한 맥을 짚어보게 만든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전시과장은 "속세에서처럼 필법의 유무나 시비에 목숨 걸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들 선승의 선필은 현대 서예에 큰 울림을 준다"고 말했다. 11월 30일까지 계속되는 청명관 전시가 끝나면 내년 1월 11일~2월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3월 23일~5월 22일 통도사성보박물관 등 공동주최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043-255-1632, 02-580-15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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