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미·북 삼각게임의 시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미 국무부는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특사자격으로 오는 10월 9~12일 미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5월 윌리엄 페리 미 대북정책 조정관의 방북 이후 17개월만에 북한의 답방이 이뤄지는 셈이다.

북한군 최고 실력자의 방미(訪美)를 계기로 그간 답보상태에 머물던 북.미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제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함께 진전을 이룩해 나갈 것인가□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까지 한반도 문제는 주로 북.미간의 협상을 통해 다뤄졌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남북대화가 한반도 문제해결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한.미.북 삼각관계가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한.미.북 삼각관계에 근거한 입체적인 사고가 필요하다.이를 통해 남북한과 미국 모두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긴장과 질투,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수반하는 인간관계에서의 삼각관계와 같이 남북한과 미국간의 삼각관계도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첫째, 남북관계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전쟁발발 방지를 위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는 기쁨과 북.미협상의 기존 틀을 남북대화가 상당부분 대체했다는 섭섭함으로 요약된다.

미국은 남북화해가 북.미간의 현안 해결에 도움을 주길 기대하면서도 자신의 주도권 약화로 인해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는 상황을 우려한다.

둘째, 북.미관계에 대한 한국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다.북한이 정상회담 합의 전까지 한국을 소외시키면서 북.미관계에만 몰두하다 뒤늦게 한국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북.미관계의 최대 현안인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 파괴무기(WMD)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북.미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북관계 개선에만 몰두할 수 없다는 데 한국의 고민이 있다.

조명록 부위원장의 방미가 북.미관계 진전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야 남북관계도 순항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그러나 한국은 북한의 미사일 포기 대가로 자신만이 지불하는 '봉' 노릇은 사양한다.

마지막으로 한.미관계에 대한 북한의 인식은 다소 복합적이다.한국에 대해 한.미.일 공조체제를 '외세' 와의 공조라고 비난해온 북한은 자신의 핵.미사일 포기를 겨냥한 한.미공조가 불만이다.

따라서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쓰면서도 북.미협상에서 야기될 수 있는 미국의 '압력' 을 한국이 대신 나서서 막아주길 기대할 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를 자신이 직접 나서서 목청껏 주장하기보다 남한 내 '반미주의자' 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대변해주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대외적으로 북한은 '착한 소년' 의 이미지를 유지해 나가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북.미관계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다는 점을, 미국에 대해서는 남북한 '자주' 카드를 강조해 나가는 것이 자신의 협상 입지를 강화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렇듯 한.미.북 삼각관계는 양자관계에 대한 제3자의 인식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남북관계, 북.미관계, 한.미관계를 단선적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결국 양자관계가 고루 진전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우선적으로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남북관계가 개선되더라도 북한이 이를 대미(對美)협상에 이용하려 할 경우 북.미관계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으며, 북.미협상의 답보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남북관계에만 집착할 경우 동맹관계인 한.미관계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북한 조명록 부위원장의 방미를 단순한 북.미관계의 개선으로 이해하기보다 남북한과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삼각게임' 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뜨거운 가슴' 보다 '차가운 머리' 가 필요한 시점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