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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72> 2009 중국 최우수 양서에 뽑힌 『주룽지, 기자 질문에 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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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글=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발매 당일 초판 25만부 매진
총리·부총리 시절 일화 담아

화제의 책 『주룽지, 기자 질문에 답하다』(사진)는 주룽지의 저서도, 자서전도, 전기(傳記)도 아니다. 그가 부총리와 총리로 재직하던 1993년부터 2003년까지의 국내외 기자회견 내용과 국외 순방 일화를 모은 책이다. 해외 언론과 인터뷰한 내용 전문이 중국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지만 상당수는 익히 알려진 발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매 당일 초판 25만 부가 모두 매진되고, 전국 각지에서 독서 교류회가 열리는 등 중국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남방일보는 ‘주룽지 신드롬’ 배경에는 “과거에 대한 추억뿐 아니라 개혁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주룽지 전 총리의 언어는 결연하고 비장하다. 그가 가장 즐겨 쓰는 말은 ‘온 힘을 다 바쳐 죽는 날까지 나랏일에 힘쓰겠다(鞠躬盡瘁 死而後已·국궁진췌 사이후이)’라는 여덟 자다. 제갈량의 ‘후출사표’ 말미에 나오는 말이자 주 전 총리가 총리 취임 때부터 애용하던 문구다.

다음은 책에 실린 인상적인 구절들이다.

2000년 9월 21일 한국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의 인터뷰 도중 한국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말 한마디를 부탁받자,

“유교(儒敎)의 대가 맹자(孟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이 어떤 이에게 큰 일을 맡기려면 먼저 그에게 큰 고통을 주어 그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킨다(天將降大任于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아마 이 같은 단련과 좌절이 개인의 성장을 돕는다는 뜻이겠지요. 나는 사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이후 어떤 고난과 좌절이 닥치더라도 전심전력으로 중국 인민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뜻을 세웠습니다. 내가 만일 오늘날 총리에 오르지 못했다면 중국 인민들을 위해 봉사할 기회가 더 적었겠지요. 앞으로도 나는 ‘죽는 날까지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칠(鞠躬盡瘁 死而後已)’ 각오입니다.” p.176

2000년 10월 14일 도쿄방송(TBS)과의 인터뷰에서 지쿠시 데쓰야(筑紫哲也) 앵커가 “소문에 의하면 총리께선 네 차례 암살당할 뻔했고 선조 묘까지 피폭당했다고 합니다. 총리 스스로 ‘지뢰밭’ 위를 걷는다고 말한 바 있고, 관을 준비해 악인들과 같이 지옥에 가겠다고 한 바 있습니다. 맞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나에 대한 여러 루머가 있습니다. 전기(傳奇)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껏 나에 관한 책이 11권이나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난 볼 시간이 없어 그 책들에 뭐라 씌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을 볼 생각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말할 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총리에 취임할 때 기자회견에서 “내 앞이 지뢰밭이건 깊은 심연(萬丈深淵)이건 상관없이 용감하게 나아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뢰’를 밟고 있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일종의 결심을 표시한 것뿐입니다.” p.193

99년 4월 2일 월스트리트 저널 피터 칸 발행인과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당신이 먼저 제출한 질문들의 답변을 비서실에서 준비했습니다. 살펴 보니 모두 ‘표준 답안’들로 당신들에게 뉴스가치가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답하진 않겠습니다. 당신이 직접 질문을 하고 즉석에서 답변하는 것이 당신 요구에 더 부합할 것입니다. 그전에 미국 방문을 앞두고 최근 생각해 왔던 것들을 먼저 말하겠습니다. 내 생각엔 이것도 약간의 뉴스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p.101

같은 인터뷰에서 피터 칸이 “일부 미국인들은 최근 반세기 동안 1989년 탱크 앞에 서 있던 젊은이의 사진이 가장 깊은 인상을 줬다고 말합니다. 총리께선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용감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잘못 알려진 것이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라고 묻자,

“그 사진은 당초 미국과 기타 국가의 영화와 TV에 자주 나왔습니다. 최근에는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줬던 또 다른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의 한 소녀가 벌거벗은 채 미군기의 폭격을 피해 도망치는 사진입니다. 그 소녀는 현재 미국에 있습니다. 나는 이런 유의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 일은 근본이 다릅니다. 모두들 생각해 보세요. 탱크와 맞섰던 사람을 결코 깔아뭉개지는 않았습니다. 그를 피해갔습니다.” p.111

2000년 9월 21일 일본 NHK의 히로코 구니야(國谷裕子) 사회자와의 인터뷰에서 개혁 불만세력이 적지 않으냐는 질문에,

“개혁은 사람들의 사상·조직·사회생활 방면에서의 한바탕 큰 변혁입니다. 따라서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저항을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앞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영향이 크던 시절에 중국의 1000만 국유기업 노동자들이 퇴출되거나 실업자로 전락했습니다. 당연히 사회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들 퇴출 노동자들이 모두 취업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내가 채택한 농업정책의 성공으로 중국인들이 먹는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양식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수요를 넘어섰습니다.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은 상황에서 양식 가격은 계속 하락하고, 농민들의 수입이 적어져 불만을 초래했습니다.” p.162~163

98년 3월 19일 총리 취임 첫 기자회견장에서 홍콩 봉황위성방송의 기자가 ‘경제 차르’라는 별명에 대한 소감을 묻자,

“외부에서 나를 ‘중국의 고르바초프’, ‘경제 차르’라고 부르는 것이 기분 좋진 않습니다. 이번 9차 전인대 1차회의에서 나에게 중임을 맡겼습니다. 어렵고 커다란 임무 때문에 인민들의 나에 대한 기대를 져버릴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지뢰밭이건 어떤 것이건 상관 않고 죽는 날까지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p.8

99년 3월 15일 전인대 기자회견장에서 대만 기자가 중국의 인권 문제를 묻자,

“최근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나는 “내가 인권보장과 쟁취 운동에 참가한 역사는 당신보다 훨씬 빠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래요?”라며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난 당신보다 나이가 열 살 더 많습니다. 당시 나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당 정권을 상대로 중국의 민주·자유·인권 쟁취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당신이 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에 말입니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봉건사회였고, 반봉건·반식민지의 역사도 겪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지 50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50년으로 어떻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p.15~16

2000년 3월 15일 전인대 기자회견장에서 덴마크 기자의 퇴임 후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내가 물러난 후 전국 인민들이 ‘그는 청렴한 관리였다. 탐관이 아니었다’라고 말해 준다면 나는 매우 만족할 것입니다. 만일 후하게 평가해서 ‘주룽지가 일을 제대로 했다’고 말해 준다면 하늘과 땅에 감사할 것입니다.” p.33

2001년 3월 15일 전인대 기자회견장에서 한국 중앙일보 기자가 주룽지 총리가 발표한 중국의 제10차 5개년 발전계획이 끝나는 2005년 시점에 주 총리 자신은 어디 있을 것 같냐고 묻자,

“내가 언제 퇴임할 것인지, 퇴임 이후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해서 나는 98년 취임 이래 줄곧 ‘용감하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온 힘을 다 바쳐 죽는 날까지 나랏일에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면 인민을 위해 죽는 날까지 온 힘을 다 바칠 것입니다.” p.48

2002년 전인대 기자회견장에서 프랑스 AFP통신 기자가 많은 중국인이 당신의 연임을 원하고 있는데, 다른 후임 총리가 당신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뭐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백성들을 겁준 적이 없습니다. 탐관오리들만 겁줬을 뿐입니다.” p.62

파란만장 인생 주룽지 전 총리

강력한 카리스마의 ‘포청천’
한때 우파로 몰려 당적 박탈

주룽지 전 총리는 선이 굵은 인물이다. 부드러운 서민 이미지의 원자바오(溫家寶) 현 총리와 대조된다.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1928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10세 때 모친마저 잃었다. 하지만 3세 때 『논어(論語)』를 익혔고 『수호지(水滸誌)』로 호연지기를 닦으며 미래를 준비했다. 47년 명문 칭화(淸華)대 전기과에 입학, 49년엔 공산당에 입당했다. 57년 반우파투쟁 당시 우파로 몰려 당적이 박탈당했고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큰 곤욕을 치렀다. 문혁이 끝난 뒤 복권에 성공, 85년 자오쯔양(趙紫陽) 총리 의뢰로 덩샤오핑(鄧小平)에게 경제 문제를 보고하면서 덩의 인정을 받았다. 87년부터 91년까지 상하이 시장과 시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91년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했고, 98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임기 1949. 9~76. 1)·화궈펑(華國鋒, 1976. 2~80. 9)·자오쯔양(1980. 9~87. 11)·리펑(李鵬, 1987. 11~98. 3)에 이어 중국의 5대 총리에 부임했다. 부총리 시절부터 1·3·5 개혁을 추진했다. 경제성장 확보가 1이요, 국유기업·금융체제·정부기구 정상화가 3이며, 식량유통·투자융자·부동산제도·의료제도·재정세제 개혁이 5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엄격한 일처리로 ‘포청천’ ‘경제 차르’ 등으로 불렸다. 퇴임 후에는 전통악기 얼후(二胡) 연주와 경극에 심취한 채 은거했다. 지난해 10월 1일 건국 60주년 군사퍼레이드에도 리루이환(李瑞環) 전 정협주석이 수차례 전화로 참석을 권해와 마지못해 참석했다고 전한다. 천안문 망루에 백발이 성성한 채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해 화제가 됐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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