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벼랑끝에 서있는 동성애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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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연예인 홍석천씨가 동성애자임을 고백했다.홍씨의 이런 ‘커밍아웃’과 관련해 KBS·MBC 등 방송국들은 그에게 일방적으로 출연정지 처분을 내렸다.

동성애자들은 심각한 우려와 함께 분노를 금할 길 없다.사실 한국엔 동성애를 금지하거나 동성애자를 억압하는 법률 규정이 없고 동성애자 인권을 보장하는 법률 규정도 없다.

바꿔 말하면 현실적으로 자행되는 동성애자에 대한 억압과 인권침해에 대한 구제기구나 보장장치가 전혀 없다는 말도 된다.

이 땅에서 동성애자는 인권문제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돼있는 ‘성적(性的)소수자’집단이다.국가권력과 사회 주류는 동성애 및 동성애자에 대해 도덕적 또는 종교적 측면으로만 접근해 왔다.즉 인권적 측면을 도외시하며 정상인과 변태라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혐오범죄·따돌림·차별·해고 등 동성애자에게 가해지는 구체적 인권피해사례에 눈을 감고 있다.

정부는 여태껏 동성애자들을 인권보장 차원에서 대하는 것을 시기상조로 인식하고 있다.그것은 한국의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자격이 없는 이등시민 내지 국외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외국인 노동자 인권도 적극 보장해야 되는 현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의 상당수(4∼10% 추산)를 차지하는 동성애자 인권을 깔아뭉개겠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동성애자 인권문제는 한 인간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인권문제와 관련돼 있다.따라서 그 인권피해 사례나 구제 및 활용방안은 국가인권기구가 지향하는 모든 인권보장장치와도 관련돼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의 대표적 사례는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과 해고문제다.동성애자로 드러나 받는 인격적 모욕과 폭력,나아가 생존권 위협은 정말 심각하다.

그럼에도 동성애자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선뜻 자신의 피해를 방어하지 못한다.폭력·해고문제가 발생하면 경찰과 직장 관련자가 편견을 갖고 문제를 축소하거나 본질을 왜곡하기 일쑤다.

따라서 국가인권위가 이런 문제를 공정하게 조사해 적절히 처리하는 인권 감시자가 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부는 도리어 동성애자를 통제하기 위한 반(反)인권적 법안을 내놓았다.정보통신부가 정보통신망이용촉진법(이른바 통신질서확립법)개정안을 최근 입법예고했다.

동성애자들은 정통부가 이 개정안을 통해 위해(危害)정보내용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 관련 사이트를 폐쇄하거나 접근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경계하며 강력 반대한다.핍박받는 한국의 동성애자들을 더욱 곤란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과 뜻있는 사회단체의 반대와 문제 지적에도 불구하고 정통부가 법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는 저의는 무엇인가.인터넷 등급제를 통해 국가권력이 인터넷 정보를 장악하고,정통부의 위상과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국내 동성애자들은 그동안 피나는 인권운동으로 그나마 정보교류가 쉬운 인터넷 상에서 상호친목을 다지고 이를 힘겨운 삶의 작은 위안으로 삼아왔다.

사이트 운영자들과 이용자들은 부단한 자기검열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혹시 통신망 운영자나 정부기관에서 동성애자 사이트에 가할지 모르는 부당한 감시와 억압을 피하기 위해,외국의 동성애자 사이트처럼 선정적인 사진이나 정보교류를 스스로 차단해왔다.

그런데 단지 동성애란 이유만으로 동성애자 사이트 정보를 사악한 것으로 몰아 차단하겠다니 서럽고 분통이 터진다.

숱한 동성애자들은 벼랑끝에 서 있다.자신의 성(性)정체성으로 인한 고민과 갈등으로 번민과 불면의 나날을 보낸다.마음을 잡지 못하면 가출을 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또한 동성애자로 드러나 가정과 학교·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왕따’로 따돌림당하고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이런 현실에서 동성애자 사이트의 역할은 매우 컸다.

동성애자들에게 올바른 정보제공과 상담,상호친목 및 정보교류의 장으로 활용돼 왔다.막연한 혐오감이나 편견을 가졌던 이성애자들의 이해를 높이기도 했다.

정통부는 동성애자 인권과 삶의 기반을 다시 암흑으로 되돌리는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동성애자들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만큼 국가·사회의 부당한 억압은 없어져야 한다.

임태훈 <동성애자 인권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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