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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m짜리 벽면을 껌 씹듯 눈으로 씹어 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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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크고 거대한 흰 벽면 때문에 병원처럼 보이던 경기도미술관 로비가 재미 화가 이상남씨의 대형벽화 ‘풍경의 알고리즘’으로 우주를 향해 떠가는 돛배처럼 경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경기도미술관 제공]

참 독하다, 이 남자. 끝이 가물가물한 우주선 통로처럼 광활한 흰 벽면을 평면 작품으로 매끈하게 밀어버렸다. 안산시 경기도미술관 로비 상단을 통째 캔버스로 삼은 화가 이상남(57)씨는 “벽면을 처음 본 순간, 날 기다리고 있는 운명적 애인을 만난 듯 ‘필’이 꽂혔다”고 말했다.

길이 46m 높이 5.5m 2층 높이 벽을 마주했을 때 이씨는 “건물을 회화처럼 주물러대는 현대건축가와 그 건축물에 눌리지 않는 화가의 그림을 보여 주겠다”고 결심했다. 듣도 보도 못한 대형벽화 소식에 미술관 쪽이 반대하고 나서자 이 통 큰 남자는 장담했다. “실패했다는 판단이 서면 완전히 뜯어내고 벽면을 처음 그대로 되돌려놓겠다.”

이달 중순부터 일반 공개된 이상남씨의 벽화 ‘풍경의 알고리즘(algorithm)’은 21세기 신세기의 메시지처럼 보는 이를 확 끌어당긴다. 벽면 앞쪽에 돛대 형상으로 휘어진 유리 구조물을 받쳐주며 두둥실 우주로 떠나갈 듯 휘파람을 분다. 연산법(알고리즘)이란 제목처럼 반복돼 퍼져가는 나눗셈 기호는 분열하면서 매듭지어지는 원통형으로 묶인다. 인간의 상상 속에서 형성된 가장 경쾌한 형태다. 타인의 촉각을 사각사각 건드리는 화면의 매끄러움은 사람 마음을 반지르르 밀고 들어온다. 모든 인간의 시간을 선과 원으로 단순화한 그는 음악처럼 멀러 멀리 퍼져가는 그 우주의 파도를 즐기라고 말한다.

“이건 21세기식 설치물도 아니고 사진영상물도 아닙니다. 가장 오래된 전통의 평면벽화입니다. 회화의 숨통을 조이는 미술관 사방 벽에 지쳐서 캔버스 밖으로, 또는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던 미술을 다시 미술관 안으로 불러들이는 시도죠. 전 저 벽면을 껌 씹듯 가볍게 눈으로 씹으라고 말합니다. ‘추잉 이미지(chewing image)’죠. 자, 씹어주세요.”

이 거대벽화에는 물론 돈이 많이 들었다. 전체 그림을 스테인리스 철판 66개에 나눠 그린 뒤 법랑 처리하고 벽면에 붙이는 작업에 드는 비용은 르네상스 시대 교황이 주문한 벽화 저리가라였다. 예산 집행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경기도미술관(관장 김홍희)이 1억원, 작가가 1억원을 떠맡았지만 1억원이 모자랐다. 모처럼 부풀어 오른 작업의 열정을 돈 탓에 접어야 하나 억울해 악이 바친 이씨 앞에 백기사가 나타났다. 현대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던 (주)커피빈코리아(대표 박상배)가 1억원을 선뜻 내놓았다. 현대미술의 최첨단을 걷는다는 뉴욕이나 런던에서도 부러워하는 글로벌 수준의 벽화는 이렇게 3박자가 맞아 떨어지면서 완성됐다. ‘백남준 할아버지가 와도 힘들 것’이라는 누군가의 예언은 빗나갔다.

이상남씨는 “벽화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피 튀기게 싸우며 했던 토론이 사실은 진짜 걸작이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저 벽화는 내 손과 가슴이 수십만 번 갈고 씹은 이미지에의 사랑에서 나온 겁니다.”

안산=정재숙 선임기자

◆이상남=1953년 서울 태생.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공부했다. 1972년 첫 전시를 열어 추상 화가이자 무대미술가로서 독창적인 화풍을 인정받았다. 91년 뉴욕에 정착한 뒤 극도로 정제된 표현과 철학을 품은 작품세계를 일구며 국제화단의 평가를 받았다. 뉴욕 브루클린 작업실과 서울을 오가며 여러 기획전과 개인전에 참가해 신작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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