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위미술 대변 '김구림-현존과 흔적' 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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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 미술계의 풍운아 김구림(64)씨. 시대를 앞서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활동, 제도와 인습을 거부하는 비타협적이고 고집스런 스타일로 인해 기성미술계에서는 '이단아' 로 평가된다.

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구림-현존과 흔적' 전은 40여년에 걸친 작품활동을 돌아보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10월 10일까지) 1971년 파리 비엔날레에 냈던 '상황' 을 포함, 회화.설치.비디오 아트.조각.영화.사진 등 50여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가는 "공간 특성상 물과 불을 이용한 대규모 작품을 전시하지 못해 아쉽다" 고 말한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전위(아방가르드)미술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1950년대 말 대구에서 화가로 출발한 그는 외국 미술잡지 등을 통해 독학으로 자신의 세계를 찾아갔다.

60년대 말 전기.공기.물.기름.비닐 등을 써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공간구조' 를 내놓았고 69년엔 문화예술 각계 인사를 망라한 전위예술가 그룹 '제4집단' 을 결성했다.

같은 해에 세계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 미디어의 유물' 을 선보였다. 문화인 1백명에게 자신의 지문 등을 담은 3차례의 시리즈 편지를 보내 이들의 반응 전체를 예술작품으로 본 것이다.

70년엔 한강변 살곶이 다리 뚝방의 잔디밭을 삼각형 모양으로 태운 '현상에서 흔적으로' 를 한국 최초의 대지예술로서 발표했다.

비디오와 일렉트릭 아트를 국내 처음으로 시도해 74년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국제 임팩트 비디오 비엔날레에 출품하기도 했다.

70년대에는 일본에서 현대판화 기법을 배워와 국내에 보급하는 한편 첫 개인판화 공방도 차렸다. 무대미술.연극연출.춤의상.드로잉.사진.비디오.도자기.조각.해프닝.퍼포먼스 등 거침없이 예술영역을 넘나들며 장르해체를 주도했다.

이번에 출품된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 (69년작)도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전위성에 대한 국내미술계의 몰이해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81년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 초대작가로 출품한 '정물B' 가 '판화가 아니다' 는 이유로 철거당했던 것이다. 탁자위에 유리컵을 올려놓은 작품이었는데 테이블보에 컵에서 흐른 물기가 스며든 모양의 판화가 찍혀있는 것이었다.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일부 기간을 빼고 주로 미국에서 살며 작품활동을 벌이다 지난 7월 영구귀국했다.

해체적 사유와 유목적 정신의 대표자인 그는 "나의 사물은 어떤 공간 속에 영원히 뚜렷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물거품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보이는 것 같으면서 보이지 않고, 없는 것 같으면서 있는 것 같은 어렴풋한 무엇이다" 고 말한다.

10월6일 오후3시 문예진흥원 강당에서는 '김구림 작품세계의 의미' 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열린다.

또 10월2~11일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 포럼스페이스에서는 소품을 위주로 한 근작전도 따로 마련했다. 02-760-4001.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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