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취중진담 취중실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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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1년간 음주 후에 죄책감이 들거나 후회한 적이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 "음주로 인해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다친 적이 있습니까. " 세계보건기구(WHO)의 진단표를 한국인에게 맞게 고쳐 지난해 내놓은 '알콜중독 자가진단표' 한 부분이다.

"얼마나 자주 술을 마십니까" 를 시작으로 10개 항목으로 나눠 빈도에 따라 점수를 매기게 한 설문형 진단표가 간단해 보여 동료들과 함께 진단해보니 대부분 상습적 과음자로 나타났다.

총 40점에서 20점 이상이면 '잠재적 알콜 중독자' , 24점 이상이면 '알콜중독자' 인데 술 좀 마신다 하면 20점 정도는 가볍게 넘고 있었다.

의료계에서는 잠재적 알콜 중독 혹은 남용은 술 마신 뒤 주정을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다음날 결근을 하는 경우고 이 단계를 지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초조해지고 땀이 나며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금단 증상이 나타나면 알콜 중독 혹은 의존으로 본다.

보건복지부는 16~64세 인구의 10%인 3백30만명을 알콜중독자, 12%인 4백여만명을 알콜 남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5명 중 1명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술병' 을 앓고 있는 것이다.

술은 역사가 따라잡을 수 없는 아득한 시대부터 인류와 같이 했다. 그후 씨족이나 부족 국가라는 사회가 형성되면서 술은 사람과 인간, 사람과 사람을 통합하는 하나의 종교적.사회적 의미를 띠게 됐다.

그러다 고려 지배층이 지어부른 '한림별곡' 등에 나타난 각종 사치스런 술자리, 서민들이 불렀다는 '쌍화점' 등에 비친 술과 애정행각 등에서 보듯 술의 향락적 요소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술은 즐겁게 마시되 함부로 하지 않으며, 엄히 하되 어른과 소원해지지 않는다. " 조선 초 정도전은 고을 사람들이 예법을 갖추고 술을 마셔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예법에 맞게 마심으로써 술로 다시 사회를 통합해 보려는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술은 약 중의 으뜸으로, 미친 약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누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정반대로 달라진다.

지금 정치권은 엄호성 의원의 '이운영씨 배후세력' 말에 취중 실언이냐, 진담이냐를 놓고 공방이 한창이다. '실언' 으로 돌리면 당사자는 '알콜 이상자' 임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

그렇지만 한빛은행 불법대출의 본질을 시원스레 밝히길 원하는 민심의 눈에는 본질에서 벗어나 자꾸 '진담' 이라는 곁가지만 붙드는 쪽 역시 작취미성(昨醉未醒)으로 보일 것이다.

이경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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