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처럼… 민정기씨, 15년간 발품 팔아 '양평의 산' 화폭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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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지도를 엮어 ‘산수화 지도’라 부를 수 있는 민정기씨의 ‘양수리’. 화가의 발길을 따라가며 자연과 역사와 시를 두루 읽고 볼 수 있는 이야기 꾸러미다.

▶ ‘이발소 그림’으로 알려진 민정기씨 의, ‘돼지’

민정기(55)씨는 1980년대에'이발소그림' 으로 이름났던 화가다. 동네 이발소에 걸려 있는 싸구려 통속 그림을 베껴놓은듯한 '돼지' '포옹' '세수'등은 발표 당시 주류미술 또는 고급미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자 취향의 반역으로 한국 미술계에 충격을 던졌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하며 이른바 순수미술에 대한 급진적 거부와 현실에 대한 발언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그는 관객과 소통하려는 마음을 쉽고 호소력 넘치게 그려 주목받았다.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흘렀다. '현실과 발언'은 해체되고 시대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음이다. 89년 서울을 떠나 경기도 양평 서후리 산골짜기로 들어간 그는 지난 15년 동안 조선시대의 큰 화가 겸재 정선처럼 발품을 팔며 그 산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일반 대중과 나누고 즐기고 싶다'는 화가의 일념은 해가 갈수록 산처럼 더 높고 단단해진듯 보인다.

2일 막을 올려 11월 14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전관에서 열리고 있는 '민정기-본 것을 걸어가듯이'는 7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품이 흘러온 자취를 따라가는 대표작가 초대전이자 회고전이다. 제목 그대로 작가는 우리 강산을 두 다리로 걸으며 얻은 즐거움과 움직이면서 보는 기쁨을 화폭에 튼실하게 풀어놓았다.

민씨가 정선 뗏목의 물길을 따라 '본 것을 걸어가듯이'그린 대형 그림 연작 '산에서 물로'는 일종의'산수화 지도'다. 다섯 폭으로 집약된 오경(五境)은 진경산수화와 옛 지도를 아우른듯 다섯 개의 나루터 장면이 옛날과 오늘을 두툼한 이야기로 묶고 있다.

'여주 신륵사'에서 출발해 이포.양수리.한강.압구정을 잇는 그림은 산수풍경과 역사와 이미지와 시를 한 화폭에 껴안았다. 미술평론가 최민씨는 그의 '산에서 물로' 연작을 "보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마을이나 산에 얽힌 내력을 공부하고 온 몸으로 느끼려 한 화가가 본 것을 관람객은 그의 그림을 통해 본다.

미술평론가 백지숙씨는 '민정기가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전통 사회에서 우리가 풍수지리라는 패러다임으로 개념화하고 포착하려 해왔던 것, 즉 인간이 땅.산.하늘.물.바람 등의 대상 세계와 맺고 있는 구체적이면서도 총체적인 삶의 관계'라고 분석했다. 지도와 그림을 장식성 넘치는 떠들썩한 화면 안에 포개어 감싼 화가의 너른 손은 '이발소 그림'시절부터 견지했던 그의 소통에 대한 의지를 떠오르게 한다.

전시와 함께 열리는 부대행사도 화가의 이런 뜻을 받들었다. 15일에는 작가에게 풍수지리와 산행답사를 이끌어준 최종현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를 초대해 '화가 M씨와 함께 가는 벽계구곡'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전시기간 중 매주 목요일 오후 3시30분 마로니에미술관 아카이브실에서 어린이교육프로그램 '체험풍경'이 이어진다. 미술관 앞 콘테이너 공간에는 민씨의 양평 작업실을 재현해 화가의 평소 생활을 엿볼 수 있게 꾸몄다. 02-7604-72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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