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원로 동양사학자 남사 정재각 선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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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17일 작고한 남사(藍史) 정재각(鄭在覺.87)선생은 강직하고 결벽한 '고인(古人)' 의 풍모를 지닌 선비였다.

고려대 교수로 재직한 36년과 동국대 총장.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등을 지내는 동안 선생은 유난히 말수가 적기로 유명했으나 염결(廉潔)함을 잃지 않았던 처신은 후학들에게 '고요한 함성' 으로 전달돼 왔다.

선생의 애제자인 고려대 강만길(姜萬吉)교수는 "신중하고 정의감 있고 대단히 자기통제력이 강했던 분" 이라면서 "늘 '20년 후에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 주시곤 했다" 고 회고했다.

일제시대 경기중.고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사학과를 나온 선생의 젊은 시절은 스스로 "망국(亡國)의 신세에 동족의 지식인들은 아큐(阿Q)적인 추태를 거리낌없이 부리던 아우슈비츠적 질곡" 이라고 개탄했던 것처럼 식민지 인텔리에겐 울분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그런 정서적 편력은 그를 '굴욕감의 자극이 덜한 곳' 인 교직으로 인도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를 도피로 생각하거나 결코 나약한 지식인에 머물지 않았다.

첫 교편을 잡은 대구 계성중(1937년)에서 선생은 2년 만에 쫓겨났다. 금지된 한국사를 마음대로 가르쳤다는 이유에서다.

고려대 교수시절에도 일어서야 할 때 분연히 일어섰다. 특히 성패의 기로를 맞은 4.19혁명을 다시 기폭시킨 4.26교수데모 당시에는 교수들의 선언문을 기초하며 혁명의 전위에 섰다.

박정희(朴正熙)정권시절에는 朴대통령에게 시중여론을 가감없이 전달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던 '수요회' 의 멤버로도 활동했다. 수요회는 교수.언론인으로 구성된 일종의 여론자문단이었다.

이런 선생의 활동은 권력과 유착한 참여교수들과는 엄연히 구분된다.

'권력을 무조건 필요악으로 보고 권력에의 반항언사에 대한 청중의 갈채를 의식한채 권력자의 반격이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을 만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 스릴을 향유하려는 지식인의 자세는 기회주의적' (저서 '역사의 여운' 중에서)이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다.

제자인 고려대 김택민(金鐸敏)교수는 "일제시대 약자의 설움을 겪은 선생의 역사관은 관념적이 아닌 사실적이었다" 며 "따라서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는 정권에 대한 선생의 시각은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 설명했다.

정신문화연구원장 시절 5공 실세장관을 집무실에서 꼿꼿이 앉아 맞이했다는 이유로 괘씸죄에 걸리자 자리를 내던졌다는 일화는 또다른 단면을 보여준다.

휴식도 중단도 없이 반세기를 후진양성에 몸바쳐온 선생은 고려대 학생처장.문과대학장.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신일철(申一澈)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 강만길.최영희(崔永禧.한림대).박성봉(朴性鳳.경북대).유인선(劉仁善.서울대).이춘식(李春植.고려대)교수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언젠가 선생은 고려대 동료교수의 영전에 "누구나 너무나 원만하고 누구나 융통성이 자유자재로워 도시 척주(脊柱)있는 인종을 발견할 수 없는 이 마당에 선생이 떠나신 자리의 공허감이 너무도 크다" 고 한스러워 했는데 이제 선생이 후학들의 똑같은 애도를 받으며 홀연히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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