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현숙 '불 속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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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살붙이였던

헌 옷가지들과 낡은 기억들에

불을 놓는다

허울의 흔적마저 떨쳐내려는

나를

풀들이 빠안히 쳐다본다

기웃거리며, 삐죽거리며

주저앉은 시간들이

일순 불꽃으로 황홀하다

마침내는 연기로 날고 싶다

허울도 덜 무거운 것만

날개에 싣고 떠나는구나

재로 뒤처진 것

흙으로 스며들까

좋아하는 풀이나 나무 가까이로 가서

- 김현숙(53) '불 속의 길' 중

허물없이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살다가 보면 때때로 헌 옷가지를 태우듯 태워버리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것들이 있다. 아무리 거센 불꽃을 피워도 태워지지 않는 그것을 김현숙은 잘도 태우고 있다. 풀들이 빠안히 쳐다보는 가운데 마침내 연기로 날아보는 자기연소. 한 줌 재로 남아서 좋아하는 풀이나 나무 가까이 흙으로 스며드는 이 거듭나기가 아름답지 않은가.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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