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버거운 상대 푸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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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러 정상회담이 끝난 5일 저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도쿄(東京)에서 유도 솜씨를 한껏 자랑했다.

유도 발상지인 고도칸(講道館)에서다. 검은 띠의 푸틴은 업어치기.배대되치기로 유단자들을 눕혀 갈채를 받았다.

그러면서 "유도를 통해 일본 문화에 대한 흥미를 넓혀갈 것" 이라며 일본과의 교류를 강조했다. 그의 유도솜씨는 정상회담 결과와 견주어졌다.

한 신문은 푸틴이 모리 요시로(森喜朗)일본 총리를 쿠릴열도 4개 섬(북방영토) 위에 눕혀놓고 조르기에 들어간 만평을 실었다.

만평은 실제 회담분위기를 족집게처럼 집어냈다.회담 석상에서 푸틴은 유도형 협상술로 나왔다. 경제협력 분야에선 공세를 폈지만 최대 초점인 영토문제가 나오면 금세 방어자세로 돌아섰다.

연내 영토문제 해결을 재촉하는 모리에게 국민 감정을 들어 되받아쳤다. 준비도 치밀했다.회담 수행단에 분리.독립 경향이 강한 타타르공화국 대통령을 포함시킨 것은 시위용 카드였다.

북방영토에서 물러나면 분리.독립 문제가 불거질 것이란 점을 일본측에 내비치기 위한 것이었다. 회견은 냉철한 승부사를 떠올리게 했다.

연말까지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키로 한 1997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합의평가에 관한 질문에는 일격을 가했다.

"법률교육을 받았다" 며 합의문을 읽어내려간 뒤 "어디에도 평화조약의 연내 체결공약은 쓰여있지 않다" 고 못박았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친분을 축으로 한 일본의 대러 관계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반면 푸틴은 경제분야에선 철저한 실리외교로 나왔다. 극동.시베리아 자원 공동 개발이 담긴 '모리.푸틴 플랜' 등 7개 합의문을 끌어냈다.

경협을 통해 영토 반환의 터를 닦으려는 일본측 의도를 들여다본 듯했다. 경협분야 초점을 사할린의 에너지 공급 기지화에 맞춘 것도 인상적이다.

모리는 회담 후 "푸틴 대통령은 새 시대 정치가로 역사를 생각하는 관점이 있다" 고 말했다.16세나 어린 상대에게 쉽게 꺼낼 수 있는 치켜세움은 아니다. 푸틴을 버거워하는 나라는 일본만이 아닐 것이다.

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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