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은행 외환딜러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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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환율이 너무 안정돼 못살겠다!" 은행 외환딜러들이 참다 참다 터뜨린 불만이다.

시중은행과 외국계 은행 외환딜러 20여명은 최근 서울 명동의 음식점에 모여 고객의 주문 외에 자신의 판단과 책임하에 달러를 팔고 사는 투기거래를 자제하기로 했다.

말이 좋아 '자제' 지, 투기거래를 포기하겠다는 일종의 '준법투쟁' 선언이다.

이날 딜러들은 요즘 환율안정은 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시장을 교묘하게 관리하는 가운데 시장기능이 극도로 위축된 상황에서 얻어진 인위적인 결과라는 데 입을 모으고 아예 거래를 중단하자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당국의 주장은 다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원화환율이 더 떨어져야 하는 데도 정부가 막아서 환율이 안정됐다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며 "최근 환율안정은 경상수지 흑자 폭이 준 데다 현대사태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투자용 달러 반입을 줄이는 등 순전히 시장수급에 의해 이뤄졌다" 고 반박했다.

◇ 환율, 너무 안정됐나〓원화의 대미달러 환율은 지난 3월부터 6개월째 달러당 1천1백10원~1천1백20원선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1월 9원50전이던 하루 평균 환율 변동폭은 3월 들어 3원 정도로 줄더니 8월 들어서는 1원30전까지 쪼그라들었다.

이에 따라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 파는 거래량도 크게 줄었다.

지난 2월 하루 평균 25억달러에서 8월에는 평균 17억6천만달러에 그쳤으며, 지난 24일에는 4억달러까지 거래규모가 급감하기도 했다.

◇ 딜러들의 불만〓달러를 사고 판 수수료와 차익으로 실적을 올려야 하는 외환딜러는 환율이 너무 안정적이면 실적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만은 최근 환율이 지나치게 안정돼 사실상 투기거래가 무의미해지는 바람에 실적을 올릴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이달처럼 하루 평균 변동폭이 1원도 안되는 날이 많아져서는 장사가 안된다는 주장이다.

딜러들은 환율안정의 이면에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 외환딜러는 "정부가 환율이 떨어질만 하면 공기업을 동원해 달러를 사들이고, 환율이 오를 것 같으면 대형 수출기업에 요청해 달러를 풀도록 하는 등 환율 변동폭을 좁히면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H은행 외환관리 계장은 "환율 변동폭을 인위적으로 좁혀놓으면 환위험이 사라진 것으로 잘못 인식돼 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며 "시장의 유동성이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기업의 위험관리 능력이 줄어 환율변동에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고 주장했다.

◇ 정부는 펄쩍〓한국은행은 시장에서 수급균형이 잘 맞는 상황에서 환율이 변동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한은 관계자는 "시장에서 수급균형이 이뤄진 것을 두고 정부개입 운운하는 것은 (외환딜러들이)자신의 밥그릇만을 의식한 발언" 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관계자는 "공기업이나 민간기업에 환위험에 너무 많이 노출되지 않도록 위험관리를 독려해 온 것은 사실" 이라며 "그러나 정부가 이들을 움직여 환율변동폭을 줄이고 있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왕윤종 박사는 "외환시장 발전을 위해서는 외환딜러들이 자유롭게 외환을 사고 파는 투기적 거래가 활성화해야 한다" 며 "이를 위해서는 현재보다는 환율의 하루 변동폭 등이 커지는 게 바람직하다" 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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